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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칼럼

영어 공부는 넓은 세상을 열어준다


원희가 5학년 때의 일이다. 원희 이모부가 미국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빨간 머리 앤 Anne of Green Gables> 비디오를 선물했다. 200분짜리 홈비디오용 영화였다. 이미 책을 읽어서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원희는 마치 생전 처음 듣는 애기처럼 호기심을 가지고 비디오에 빠져들었다. 나도 옆에서 같이 봤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책으로 볼 때와 달리 앤이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훌륭한 꼬마 숙녀로 성장하는 과정이 정말 실감나게 그려져 있었다. 말도 많고 샘도 많고 심술도 많고 똑똑한 앤이 양할머니, 양할아버지에게서 깊은 사랑을 받게 되는 과정, 친구들의 따돌림을 잘 견디며 아이들과, 그리고 단짝 친구와 우정을 쌓아 가는 과정, 사춘기 때의 사랑, 이 모든 것이 매우 섬세하고 재미있게 그려져 있었다. 정말 5학년 사춘기 소녀 원희를 강하게 유혹할 만한 영화였다.


 원희는 이 영화를 굉장히 좋아해서 여러 번 반복해서 보았다. 우리말도 아니고 자막도 없는데 내용을 거의 다 파악하는 것 같았다. 보면서 내가 모르는 부분은 설명까지 해주었다.




영화 '빨간머리 앤' DVD 표지 


 똑똑하고 샘 많고 똑부러지는 성격의 앤은 원희와 많이 비슷했다. 내가 보기에는 볼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얼굴 모습까지도 원희와 많이 닮아 있었다. 원희도 영화 속의 앤을 자기와 상당히 동일시하는 것 같았다. 푸른 숲 우거진 아름다운 마을, 심술궂은 친구들, 입 안의 사탕이라도 꺼내서 나눠 먹고 싶은 정겨운 단짝 친구, 학교생활…. 그 속에 앤이 있고, 그리고 원희가 있었다.


 원희는 그동안 영어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었고 외국인 선생님과 공부도 해 봤고 영화나 동화 등을 통해 외국 아이들의 모습도 많이 봐 왔다. 하지만 영화 속의 주인공과 완전히 동화되어 그 속에 푹 빠졌을 때의 감정은 도 달랐던 것 같다. 원희는 앤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흉내 내 보기도 하고 많은 부분은 외우기까지 했다. 영어 그대로의 그 소리, 그것을 말하는 아이들, 그 사건들이 벌어지는 공간, 이 모든 것들이 원희와는 별개의 세상이 아니라, 바로 자기의 또 다른 세계였다. 만약 원희가 우리말 자막을 통해서 해석해 가며 그 영화를 봤다면 그만큼의 감동을 느낄 수 있었을까? 나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것이 바로 문화적인 충격 내지는 문화적인 동일시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원희에게 자기 또래 아이들의 얘기를 다룬 쉬운 소설을 찾아 읽혔다. 굳이 영어를 배운다는 생각보다는 외국 아이들의 생활이나 감성을 이해하고 문학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특히 <작은 아씨들 Little Women>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LittleWomen6.jpg

미국의 작가 올컷이 발표한 장편소설, '작은 아씨들'


 원희가 우리말이나 영어 자막이 없이도 비디오를 잘 본다는 사실이 또한 나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그래서 많은 만화 영화 비디오를 구해 보여주었다. 원희가 6학년 때는 할리우드의 만화영화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전 세계를 사로잡던 때였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킹, 포카혼타스, 토이스토리, 뮬란, 이집트의 왕자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만화 영화의 전성기였다.


 원희도 이들 만화를 굉장히 좋아해 개봉될 때마다 극장에 가서 거의 빼놓지 않고 보았다. 이들 만화 영화 비디오를 사다가 원희에게 다시 보게 했다. 우리말 더빙이 돼 있는 것은 피하고 영문 자막 처리가 돼있는 것으로 구입했다. 자막을 가린 채 틈틈이 보게 했더니 몇 달 동안 여러 편을 반복해서 볼 수가 있었다. 내용을 이미 아는 것이기 때문에 내용 파악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고 아주 재미있어했다. 가끔은 나도 옆에 앉아 함께 보면서 무슨 말인지 물어보면 영어로 잘 말해주었다.


 영어로 완벽하게 다 듣게 하거나 부분적으로 외우게 하지는 않았고, 무슨 말인지 정말 궁금해하는 것만 자막을 보게 했다. 더 이상은 욕심을 내지 않고 그 정도로 비디오 감상을 끝냈다. 아주 즐거운 영어 체험이었던 것 같다.


 원희가 6학년이 끝나갈 무렵에는 AFN이나 CNN 뉴스 교재를 사다 들려줘 보았다. 그 당시에는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듣기 공부를 위해 한 번쯤은 거쳐 가는 책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조금 과욕을 부린 면이 없지 않다. 내레이터가 뉴스를 말해주는 것을 테이프로 들은 다음 책의 스크립트를 보면서 들은 내용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구성이었다. 스크립트 중 몇 단어씩은 빈칸으로 되어 있어서 들으면서 채워 넣게 돼 있었는데, 원희가 너무 어려워해서 그것은 시키지 않았다. 미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접하게 해주고 성인들이 사용하는 본격적인 영어를 들으면서 영어의 리듬에 익숙해지게 한다는 데 만족한다는 생각으로 쉬운 내용만 골라 조금씩 꾸준히 들려주었다.



주한미군 지부 방송 AKFN(American Forces Network Korea) 뉴스 중


 '어느 날 갑자기 귀가 열렸어요'라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원희의 듣기 실력이 놀랍게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몇 번 들려주고 나서, '무엇에 관한 내용이다'정도로 주제만 얘기해 주면 원희는 부분적으로 각 단락이 무엇을 말하는지 제법 정확하게 맞춰 냈다.


 원희가 중학교에 가고 나서는 TV의 영어 방송 프로그램을 녹화해서 조금씩 보게 했다. 주로 광고나 뉴스 프로였다. 책이나 테이프로 공부하는 것과 달리 화면이 있으니까 훨씬 재미있고 스토리를 짐작하기도 쉬웠다. 꽤 많이 보여줬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얘기가 몇 편 있다. 병원에서 개들이 환자와 함께 놀아줌으로써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와 맹인견 얘기를 재미있게 본 것 같다. 그 다음 또 하나 기억나는 게 바비 인형 얘기다. 나와 원희는 그 뉴스를 보면서 바비 인형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게 아니라 미국에서도 그렇게 인기라는 사실을 알고 무척 흥미로웠다.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인형 하나씩을 손에 들고 있는 화면을 보면서 짐작한 것이다.


 보다 보니까 정확히 뭐라고 말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중간 부분에 가서 "forty kilometer, one hundred seventy centimeters..." 이런 식으로 수치를 꼐속 나열하는 말이 선명하게 들렸다.


 "원희야, 뭐라는 소리니?“ "바비 인형 같은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얘긴가 봐, 인간이 저러면 기형이라는 얘기 같은데?“ "아, 그래!"원희 말이 맞는지는 사실 확인된 바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나름대로 해석하는 원희가 정말 신통했다.


 오래전 잡지에서 읽은 얘기 하나가 생각난다. 어떤 남자가 쓴 글인데 이런 내용이었다. 이 사람이 미국에 출장을 갔다. 낮에는 사람 만나서 일을 보고 저녁에 한가하니까 영화 구경을 갔다. 미국이니까 영화에 우리말 자막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영어를 그대로 알아들을 만큼 실력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결국 조금씩 들리는 말에 의존해 온갖 상상을 동원하면서 영화를 봤다.




영화 <트웰브 몽키스> 포스터


 그런데 이사람은 그 내용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트웰브 몽키스>라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원래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고 시공을 초월하면서 인류의 구원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환상정인 내용의 공상과학 영화다. 사실 한국어 자막으로 봐도 내용을 단번에 이해하기는 어려운 묘한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영화를 말조차 통하지 않은 채 봤지만 이 사람은 그 자유로운 상상력과 환상적인 스토리에 정말 매료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의 일이다. 너무 감동적이었던 그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서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영화를 빌려다 다시 봤단다. 물론 자막까지 있어서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자기가 미국에서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본 내용이 훨씬 재미있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파악한 내용은 비슷하지만 그때는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스스로 훨씬 더 멋진 얘기를 만들어 가면서 본 것이다.


 영어를 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로는 완벽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더 매력적일 수도 있는 것 같다. 실제보다 더 넓고 무한한 환상의 세계를 만날 수 있게 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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