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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뉴스

책 안 읽는 아이, 이렇게 하면 ‘독서 흥미’ 생긴다!

부모님이 함께 하는 '독서'가 아이를 성장시킨다



현재 교육에서 나날이 강조되고 있는 능력은 글쓰기와 발표 능력이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요구하는 인재는 입력이 아니라 입력된 정보들을 새로 조합해 새롭게 출력하는 창의력과 사고력, 융합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글쓰기와 말하기 능력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독서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책을 많이 읽어야 제대로 쓸 수 있고, 제대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학부모들의 고민은 여기서 출발한다. 아이가 도대체 책을 읽지 않는데 어떻게 독서를 하게 만드느냐는 것이다.

아이들이 독서를 하지 않는 이유는 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를 체감하지 못할뿐더러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독서는 컴퓨터 게임이나 유튜브 영상보다 몰입하는 데까지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이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아이는 금방 지루함을 느끼고 책을 멀리하게 되는 것이다.

독서에 동기와 흥미를 심어주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책을 읽지 않는 아이에게 학부모가 해줄 수 있는 첫 번째 교육이다. 그렇다면 동기를 심어주고, 흥미를 느끼게 할까?

독서교육을 위해 학부모가 해야 할 일은 ‘함께 읽는 것’!

아이가 독서에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심어주는 것은 부모님과 함께 독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대부분의 학부모는 아이에게 ‘독서하라’는 잔소리도 많이 하고, 함께 서점에 가서 책을 구매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 책을 읽는 부모는 많지 않다.

물론 시간이 많지 않은 학부모에게 함께 책을 읽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아이가 독서에 대한 흥미를 스스로 끌어낼 수 있는 수준이 될 때까지 만이라도 함께 해준다면 아이의 학습능력은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독서를 함께 하라고 해서 유아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처럼 할 필요는 없다. 우선 서점에 가서 이번 주, 혹은 이번 달에 함께 읽을 책을 상의하며 선정한다. 그리고 완독 날짜를 정해 각자 시간이 나는 때 책을 읽은 후, 완독하기로 약속한 날짜가 된 날 서로 책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1~2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보는 것이다.

이 간단한 활동만으로도 아이의 능력은 눈에 띄게 성장할 수 있다. 일단, 부모님과 함께 무엇인가를 해 나간다는 연대감은 좋은 독서 동기를 심어줄 수 있다.

또한 부모님과 독서 후 토론을 하고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아이의 이야기만 듣지 말고, 부모도 함께 책 속의 어떤 사건이나 인물의 행동, 성품에 관련한 의견을 주고받는다면 아이는 스펀지처럼 그 의견들을 흡수하고, 사고력을 확장해나갈 수 있다.

한편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에서도 부모가 아이의 주장을 들어주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일부러라도 반대의견을 펼쳐나간다면 부모의 뜻을 꺾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아이는 계속 생각하고, 주장하며 논리력까지 향상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좋을까? <톡톡> 4월호 인문학 코너에 실렸던 내용을 소개한다. 아이들이 혼자 읽기는 다소 버겁지만 부모님이 함께 한다면 아이는 천군만마보다 더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셈이다.

*이하 콘텐츠는 초등 잡지 <톡톡> 4월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프란츠 카프카 <변신>과
나카지마 아쓰시 <산월기>로 알아보는
소설 속 인간, 왜 변신할까?

평범한 기자가 안경을 벗으면 슈퍼맨이 되고, 동굴 속에서 100일 동안 쑥과 마늘을 먹으며 인내한 곰은 사람이 됩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변신’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상상의 활용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죠.

하지만 오늘 소개하려는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혀 즐겁지 않은 변신을 했습니다. 한 사람은 바닥을 기어 다니는 징그러운 벌레로,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이성을 잃고 사람을 잡아먹는 무서운 호랑이로 말이죠. 더 이상한 것은 이 변신은 그 주인공들이 원했던 변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어느 날 갑자기 눈떠보니 변신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죠.

이들은 왜 원하지 않는 ‘흉측한’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 걸까요? 그리고 작가들은 이들의 변신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카프카 <변신>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철갑처럼 단단한 등껍질을 대고 누워 있었다. 머리를 약간 쳐들어보니 불룩하게 솟은 갈색의 배가 보였고 그 배는 다시 활 모양으로 휜 각질의 칸들로 나뉘어 있었다. 카프카, <변신> 中



줄거리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불안한 꿈을 꾸고 난 후 일어나보니 흉측한 벌레로 변했습니다. 의사소통도 단절된 채 방 안에 구어박힌 그레고르. 가정의 경제를 도맡았던 그는 경제력을 잃은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스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레고르의 이런 걱정은 모두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가족들은 저마다 일거리를 찾아 돈을 벌며 살아가죠. 그 모습이 어쩌면 그레고르가 사람으로 가정의 경제를 책임질 때보다 활기차보입니다.

한편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를 대하는 가족들의 태도는 냉담하기만 합니다.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귀찮아하는 가족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하숙인 3명을 들입니다.

그런데 여동생이 하숙인 3명 앞에서 바이올린을 켜다가 그레고르가 등장해 한바탕 소동이 일고 가족들의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이때 여동생은 “저것이 정말 오빠라면 우리가 자기와 같은 짐승과는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쯤은 벌써 알아차리고 제 발로 나가주었을 거예요.”라고 말합니다. 이날 밤 그레고르는 죽음에 이르고, 가족들은 그의 시체를 집에 버려둔 채 미래를 향해 기차에 몸을 싣습니다.

악몽과 같은 현실과 괴이한 탈출

그레고르의 직업은 보험외판원입니다. 영업사원이지요.

“아아, 세상에! 나는 어쩌다 이런 고달픈 직업을 택했단 말인가. …… 기차를 제대로 갈아타기 위해 늘 신경 써야 하는 일, 불규칙하고 형편없는 식사, 상대가 바뀌어 결코 오래갈 수 없는 만남과 결코 진실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인간적 교류. 악마여, 제발 이 모든 것들을 다 가져가다오.”

그레고르의 대사를 살펴보면 그가 일에 매우 지쳐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로부터 도피하려는 욕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지요. 또한 그레고르는 진정한 자신이 누구인지, 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합니다. 가족들은 자신을 돈 벌어오는 기계정도로만 여길 뿐, 그 이상의 정을 나누지 않았는데요. 때문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그레고르는 벌레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나카지마 아쓰시 <산월기>

일본 교과서에 늘 실리는 ‘국민교재’ 산월기는 이징이라는 인물이 호랑이로 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해버린 것처럼, 그는 어쩌다 호랑이로 변해 숲 속에 숨어 살고 있는 것일까요? 줄거리를 읽어봅시다.

어쩌다 미쳐버려 짐승이 되었도다
재앙과 우환이 겹쳐 벗어날 수가 없네
지금 나의 발톱과 이빨에 누가 감히 대적하리
옛날에는 자네와 나의 명성 드높았지
나는 한 마리 짐승 되어 숲 속에 있지만
자네는 가마 타고 세상을 호령하는구나
오늘 밤 산과 계곡을 비추는 밝은 달을 바라보며
시를 읊으려 해도 단지 짐승의 울부짖음이라 나카지마 아쓰시, <산월기> 中



줄거리

당나라 현종 때,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이징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에다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해 관직을 버리고 시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쉬이 되지 않고 점점 가난해지자 그의 인상도 험악해지고 몸도 말라갑니다.

그는 처자식을 위해 뒤늦게 지방관리직 자리를 얻었지만, 과거 자신의 동기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윗사람이 된 것에 불만을 가졌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잠자리에서 일어나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발광하다가 산 속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실종이 됐죠. 그리고 그 날 부로 산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가 나타나 횡포를 부립니다.

어느 날, 이징과 절친했던 ‘원참’이라는 사람이 이 산을 지나가는 도중 호랑이와 마주칩니다. 그런데 호랑이가 갑자기 몸을 피해 달아나더니 어디선가 이징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징은 자신이 지금 호랑이가 되었다며 자신의 시를 잘 기록해 후대에 남겨주고, 남은 처자식을 잘 챙겨 달라 당부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호랑이로 변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시로서 명성 얻기를 원하면서도 스스로 스승을 찾아가려고 하지도 친구들과 절차탁마에 힘쓰려고도 하지 않았다네. 또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끼는 것도 수치스럽게 생각했지. 나는 점차 세상에서 벗어나고 사람들과 멀어지며, 번민과 수치와 분노로써 내 속의 겁 많은 자존심을 더욱 살찌게 했다. 인간은 누구나 맹수를 키우는 사육사이며, 나의 경우에는 거만한 수치심이 맹수였다. 이것이 나를 해치고 처자를 괴롭히며, 친구에게 상처를 주고, 결국 내 외모를 이렇게 바꾸어버렸다.”

삶을 사랑하지 않은 자, 인간으로 살 자격도 없다

이징은 자신이 호랑이로 변한 것에 대해 ‘겁 많은 자존심’과 ‘거만한 수치심’ 탓이라고 했습니다. 이 의미는 이징의 대사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내가 옥구슬이 아닐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애써 각고하여 닦으려 하지 않았고, 또 내가 옥구슬임을 반쯤 믿는 까닭에 그저 줄줄이 늘어선 기왓장들 같은 평범한 속인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이징은 시인이 되어 이름을 떨치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신이 그런 인재가 아닐 수 있다며 스스로를 의심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혹시 나는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인재일 수 있다.’라는 생각에 평범한 이들과 어울리는 것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요. 이런 마음이 이징의 외모를 호랑이로 바꿔버리고, 다시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없도록 만든 것입니다.

생각해보기: 소설 속 인간, 왜 변신할까?

우리 마음속에는 ‘짐승’이 살고 있다

카프카의 <변신>에 등장하는 그레고르는 하루도 빠짐없이 일을 해서 빚을 갚고, 가족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살아가는 가장으로, 그에게 ‘노동’은 혹독한 고문에 불과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끝없는 악몽 같은 현실에 탈출구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벌레처럼 흉측한 인생’을 견뎌내고 있던 것입니다. 이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그의 인생과 닮은 벌레가 되었습니다. 벌레가 된 그는 더 이상 가족을 위해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죠. 노동과 그의 삶으로부터 도피하게 된 것입니다.

한편 <산월기>에 등장한 이징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매우 허비합니다. 꿈을 위해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얄팍한 자존심 때문에 다른 이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합니다. 허송세월 속에 초조하기만 한 그의 얼굴은 점점 흉악하게 변해가죠. 마치 호랑이처럼 말입니다. 어느 날 그는 정말로 미쳐서 산으로 뛰어 들어가 호랑이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쌓인 고통을 먹고 살아가는 ‘짐승’이 있습니다. 이 짐승은 우리 인생의 힘들고 고달픈 부분을 좀먹고 살아가며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점점 우리를 고립시킵니다. 두 소설은 마음속 짐승에게 삶을 잡아먹힌 인물들을 통해 우리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삶을 잡아먹힌 ‘껍데기 인간’

<변신>에서 나타난 그레고르의 변신은 혹독한 현실에 대한 ‘탈출’로써의 의미가 강하고, <산월기>의 변신은 인간이었을 때의 시간과 인생을 소중히 하지 않은 이징에 대한 ‘징벌’로써의 의미가 강합니다. 하지만 두 작품에서 나타난 변신은 한 가지 공통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마음속의 짐승에게 인생을 잡아먹힌 ‘껍데기 인간’이라는 것이죠.

이들은 주변 사람들과 원활한 교류나 가족과의 속 깊은 교감도 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또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죠. 이런 껍데기 인간은 자신을 노리던 마음속 짐승에게 서서히 잡아먹힙니다. 결국 그레고르는 벌레가, 이징은 호랑이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때 비로소 인간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인간의 껍데기를 쓴 채 인간과 동일한 생물학적 구조와 신진대사를 한다고 해서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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