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

예술가로 환생한 나르키소스, 살바도르 달리

‘정상’을 거부한 달리, 현실을 넘어선 의식세계를 보여주다



본 기사는 <나침반36.5도> 매거진 5월호 p.70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나르키소스는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그 모습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연못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이후 나르키소스는 ‘자기애’의 상징이 됐다.

예술계에도 엄청난 자기애 속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이 있다. 바로 초현실주의의 대가, ‘살바도르 달리’다. 그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이라도 그의 사진이나 작품을 본 사람이라면 쉽게 잊기 어렵다. 대단히 괴상하고 또 인상적인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자기애로 똘똘 뭉친 그의 오만함에도 세계가 ‘천재’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 작품 세계를 확인해보자.

“나는 초현실주의 그 자체다.”


살바도르 달리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기억의 지속>은 그의 고향인 카탈루냐 해안 절벽을 제외하면 비현실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녹아내리는 것 같은 시계는 이 그림이 세계적 명성을 얻는데 한 몫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이 시계를 치즈가 녹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며, 이를 ‘시간의 카망베르 치즈’라고 표현했다. 구성요소들을 왜곡해 영원과 소멸에 대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한편 달리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 메이 웨스트의 사진을 이용해 <초현실주의 아파트>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이 그림은 이후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와 함께 팝아트 예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내가 달리라는 사실이 너무 기쁘다.”


살바도르 달리는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월트 디즈니를 또 다른 초현실주의자로 여기며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결국 월트 디즈니와 합작한 작품까지 내놓게 된다.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까지 손을 뻗었던 것이다. 하지만 <데스티노>는 재정악화로 작업이 중단되고, 달리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그의 작품세계를 재구현하며 완성됐다.


   

또한 그는 초현실주의를 회화에 국한시키지 않고 오브제로 제작하기 시작한다.

실제 물질로 만들어진 대상을 통해 무의식 속에 감춰진 욕망이 훨씬 더 잘 드러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그림 말고도 판화나 조형물, 사진, 영상, 광고, 무대 디자인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세계를 표현했다.

프로이트와 달리, ‘무의식 탐험가’들의 운명적 만남


달리는 21살의 나이에 프로이트 <꿈의 해석>을 읽고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였던 당대 심리학의 권위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만나길 갈망했다. 그러던 1938년, 드디어 달리가 그렇게 학수고대하던프로이트와의 만남이 이뤄졌다.

그러나 둘의 만남은 썩 좋지 못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당시 60대의 나이였던 프로이트는 미술적 교양이 풍부했으나 초현실주의자들을 ‘얼간이’, 그 작품을 ‘멍청이들의 기행’이라고 칭할 만큼 그들의 예술 사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달리에게도 냉담했다.


고대하던 프로이트와의 만남이 실망스럽게 끝나자 달리는 대면 중 그를 스케치했는데 눈이 움푹 들어가고 노쇠한 모습의 프로이트를 그려냈다.

“나는 이때 그의 임종을 예견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사실 달리를 매우 매력적인 스페인 청년으로 평가했다. 또한 달리로 인해 초현실주의에 대한 편견이 바뀌었다고도 털어놓았다.

“지금까지 나를 보호자 겸 성자로 모시는 초현실주의 얼간이들을 보았다. 그런데 어제 본 스페인 청년은 솔직하고 열광적이며, 뛰어난 솜씨까지 가지고 있어 내 생각을 바꿔놓았다. 그가 어떻게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가를 분석적으로 조사해볼 만하다.”

한편, 달리 역시 1952년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프로이트에 대한 존경심이 변하지 않았음을 표현했다. “나는 한 치의 주저 없이 프로이트를 영웅의 범주에 분류해 넣었다. 그는 유대민족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영웅이었다. 모세에 버금갈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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