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코칭

잊혀가는 영웅 ‘독립군’

독립 향한 열망 하나로 사상과 이념이 다른 이들이 하나 되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무더운 여름을 나고 있던 백성들은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게 된다. 치직거리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것은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이었다.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3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빼앗겼던 나라를 다시 찾은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백성들은 목이 터져라 환호하며 너도나도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100년도 채 지나지 않은 73년 뒤인 2018년 8월 15일. 우리는 매일 겪어야 했던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화롭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는 모두 나라를 지기키 위해 목숨 바쳐 싸웠던 독립운동가가 없었으면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광복 73주년을 맞아 한국에서 무장투쟁한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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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청소년 진로 학습 인문 시사 매거진 <나침반36.5도> 8월호에 수록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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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빼앗긴 고통만큼은 견딜 수 없다”

1800년대 후반부터 조선은 일본, 청나라,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과 수많은 불평등 조약을 체결해 이권을 빼앗겨 그들로부터 끊임없는 침탈을 겪게 된다.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강탈하고 조선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시킨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절망적인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자유와 해방, 민족국가의 회복을 갈구하며 여러 분야에서 끊임없는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독립운동의 방법은 크게 두 계열로 나뉜다. 하나는 언론·교육·경제 활동 등을 통해 민족의 역량을 기르자는 ‘애국계몽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에 대해 직접적인 무력을 행사하는 ‘무장독립운동’이다. 애국계몽운동은 대부분 국내에서 일제의 감시를 받으며 진행돼 여러 제약이 많았다. 반면 무장독립운동은 주로 만주나 연해주 또는 미주 등의 해외에서 진행됐기 때문에 일제의 간섭을 비교적 덜 받았다. 하지만 해외에서 진행됐던 만큼 여러모로 고달팠던 것도 사실이다.

국내 항일운동 한계 절감, 해외에서 무장 투쟁한 독립군

독립군 단체들의 투쟁은 구한말 을사조약으로부터 시작해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한 1910년을 지나 일제에 해방되는 1945년까지 계속됐다. 1910년대 초반에는 일제의 무단통치로 인해 국내에서는 주로 비밀 결사 형태의 독립운동이 전개됐다. 그러다 점차 국내 항일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와 연해주 일대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1919년 3·1운동 이후 비폭력 항일운동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고 자각하고 무장독립전쟁을 벌이는 것이 독립을 달성하는 지름길이라고 인식했다. 특히 당시 만주와 연해주는 한인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며, 국내와 가까운 대신에 일본의 통제가 직접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1920년대에는 이들 지역을 기반으로 많은 무장독립운동 단체가 결성됐다.
 
■ 1910년대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서간도 경학사, 부민단 조직, 신흥강습소(이후 신흥무관학교) 설립
북간도 대종교 계열 중광단, 대한국민회 등 조직, 명동학교, 서전서숙 설립.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조직
연해주 대한광복군정부 설립. 대한국민의회 조직
*대한광복군정부와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됨
상하이 신한청년당 조직

 
애국선열의 희생과 헌신이 가져다 준 ‘광복’

독립군 부대는 본격적으로 국경 부근에서 일본군을 공격하거나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입해 일본군과 경찰서를 공격하는 등 식민 통치 기관을 공격해 많은 전과(戰果)를 올렸다. 이러한 가운데 1920년,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은 일본과 전투를 치르고 큰 승리를 얻게 된다.

독립군은 봉오동 일대를 습격한 일본군을 대상으로 첫 번째 승리를 쟁취했으며(봉오동 전투), 봉오동에서 패한 일본과 두 번째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둔다(청산리 대첩). 그러나 대패한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에 있는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하기에 이른다(간도 참변).

1931년, 김구는 한인애국단이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고 일제의 주요 인물을 암살해 일본의 국가 운영 체계나 대외침략을 좌절 시키는 즉, 소수 지도자를 제거해 큰 성과를 올리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한인애국단에 소속된 대표적인 인물인 이봉창과 윤봉길 외에도 한인애국단 소속 독립운동가들은 여러 곳에서 주요 인물을 표적으로 하는 암살계획이 추진되고 성공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일본을 매우 긴장하게 했다.

1940년, 중국 충칭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현 육군의 모태가 된 한국광복군을 창설한다. 그리고 중국 각지에서 중국군과 협력해 일본과 싸웠으며, 멀리 인도와 미얀마 전선까지 나아가 영국군과 함께 대일 전쟁에 참여했다. 한국광복군은 미국 OSS의 특별 훈련을 받으며 국내 상륙 작전을 준비했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실행하지는 못했다.

비록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 덕에 한국은 자주적인 독립을 이루지 못했지만 독립군의 끈질긴 항일무장투쟁은 광복의 밑거름이 될 수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의 희생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편, 올해 국가보훈처의 보훈예산은 5조 4,863억 원이다. 여기에 따른 수급대상자들이 늘어나기도 하지만 여전히 많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독립운동가 자손으로 받아야 할 혜택에서 소외돼 있다. 또 후손들이 선조가 독립운동을 했는지 모르는 경우도 상당한데, 이는 독립운동 자체가 은밀하게 이뤄졌고, 광복 이후에도 일부 친일인사들이 득세하면서 독립운동가 상당수가 움츠러든 채로 여생을 보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독립군, 독립운동가 이외에도 사료에 남지 않았거나 제대로 조직돼 있지 않았던 수많은 선조들이 흘린 피와 눈물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겠다. 

*사진 출처 : 일요신문, jmagazine.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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