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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뉴스

‘반일파의 우두머리’… 조선교육령을 지지하다

남과 북이 함께 존경하는 유일한 교육자이자 사상가
사범학교 입학 못해 의학교 선택…결국 교사의 길로
‘조선교육사’ 명저 저술…조선어학회‧흥업구락부 연루
민족적 양심 온전히 지키기 어려웠던 불행한 교육자

 

남과 북에서 함께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이 얼마나 있을까? 고대나 중세에서는 을지문덕, 강감찬 등 몇 명 정도를 거론할 수 있지만 개항기 이후로는 찾기 어렵다. 교육자 중에서는 더욱 그렇다. 식민지 역사 청산 과정의 차이와 이념의 분열이 만들어낸 남북 역사의식의 차이를 드러내는 서글픈 현상이다.
 

그런데 예외적인 인물이 한 명 있다. 바로 이만규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낯선 인물이지만 남쪽의 교육학자들에게는 ‘조선교육사’라는 명저의 저자 또는 해방공간에서의 진보적 교육사상가로 잘 알려졌다. 북측에서는 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교육성의 보통교육국장으로서  초중등 교육제도를 체계화한 출중한 교육 행정가였으며, 북한의 표준어인 문화어를 체계화하는데 기여한 국어학자였고, 역사연구의 기초 사료인 ‘고려사’나 ‘리조실록’의 번역을 주도한 고전전문가이기도 하다. 생애 후반기에는 조국통일사 사장을 맡아 통일 사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기도 했다. 이런 공로로 그는 둘째 딸 이각경(여운형의 조카 여경구와 결혼) 부부와 함께 평양 교외의 애국열사릉에 묻혀있다. 
 

이만규는 1889년 12월 2일 강원도 원성군 지정면 간현리(현 원주시)에서 태어났다. 1906년경에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한성(서울)으로 올라와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하려 했으나 사정상 못하게 되자 차선책으로 관립의학교에 들어갔다. 학비 면제와 숙식제공 등 좋은 학업 조건에 끌려서 한 입학이었다. 사범대학과 교사가 의과대학이나 의사보다 대우받던 호시절이다.
 

 

의학교 재학 중에도 그는 기독교계통의 경신학교, 공옥학교, 상동청년학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이 시기에 이들 사립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관여했던 김규식, 남궁억 등을 만났다. 특히 강원도 출신으로 관동학회를 조직해 국어운동과 자강운동에 헌신하고 있던 남궁억을 만난 것은 교육자로서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11년 조선총독부 의원 의학강습소를 졸업해 조선총독부가 발급한 최초의 의사자격증을 얻었다. 졸업 후 친일 관료 이봉래가 경성 미동에 세운 사립봉명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으나 1년을 채우지 못했다.
 

1912년 송도(현 개성)에서 동료와 병원을 개업했으나 역시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 길은 교직이었다. 윤치호가 교장으로 있던 기독교계 한영서원(후일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생리와 수학을 가르쳤다. 윤치호와 이만규의 인연은 이후에도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윤치호가 그를 ‘반일파의 우두머리’로 묘사한 것을 보면 당시 그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한영서원 재직 중 벌어진 애국창가집 사건에도 연루돼 경찰서를 드나들었다. 송도에서 교사생활을 하는 동안 중국을 오가던 민족운동가 여운형과의 교류도 잦았다. 
 

 

송도고등보통학교 재직 중 3․1운동을 맞았고 만세운동 사전 모의, 독립선언서 배포, 학생 선동 등 보안법 위반 혐의로 4개월 간 조사를 받았으나 예심 종결로 기소를 면해 석방됐다. 조사과정에서 그는 “그대는 전부터 독립을 희망하였는가?”라는 일본 검사의 질문에 “나는 평소에 그와 같은 희망을 갖지 않았으며 이번 OOO 등으로부터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독립이 된다면 독립을 하였으면 하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그 후 도저히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그 희망을 포기하였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총독부 심문조서에 기록돼 있다. 만세운동에 적극 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록을 남김으로써 기소를 면하고 교직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20년대 초부터 이만규는 교육자로서의 활동과 함께 언론을 통한 사회계몽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에 ‘처세와 상식’ ‘민풍’ 등을 연재해 교육과 국민의식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1926년 그는 경성의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옮기면서 기독교 단체 YMCA(기독교청년연합회)와 이승만의 지시로 신흥우가 조직한 문화운동 단체 흥업구락부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두 단체는 모두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으며 식민지 현실을 인정하는 체제 내적 운동이었다. 당시 이들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대부분의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은 1930년대 들어서 친일로 돌아섰다.
 

그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지금까지 이만규 연구자들의 대체적인 해석은 그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1938년 흥업구락부사건에 연루돼 해직됐다는 것, 해직 기간 동안 진보적 역사관을 담은 ‘조선교육사’와 ‘가정독본’을 집필했다는 것, 그리고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심한 고문과 감옥 생활을 경험했다는 것이 그 증거로 제시됐다. 이만규가 3․1운동 이후 일정 기간 동안 일본 경찰의 감찰대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만세운동 주도 혐의로 조사를 받은 후 1930년대 초반까지 일본 경찰은 그에 대한 감시와 관찰을 지속했다. 
 

이만규의 활동은 학교교육, 기독교, 조선어 세 영역에서 매우 활발했다. 제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교실 수업 뿐 아니라 학생 지도 등에 매우 열정적이었다. 이즈음인 1934년 10월 26일부터 11월 15일까지 그는 경기도 중등교사 내지학사 상황시찰단에 참여해 일본 각지의 문화시설을 시찰했다. 일본내지시찰은 당시 일제가 조선 지식인들의 회유를 위해 활용한 방식의 하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식민통치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에 작은 혼란을 가져왔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1938년 3월 일제는 내선일체를 표방한 이른바 제3차 조선교육령이 발표됐다. 학교 명칭의 일본식 통일, 일본어 교육의 강화, 조선어 과목의 수의과목으로의 격하 등이 핵심내용이었다. 이를 전파하려는 목적으로 매일신보는 좌담회를 개최하고 5월 5일 자에 게재했다. 동원된 교육자는 김활란, 윤일선, 이춘호, 조동식, 그리고 이만규 등 12명이었다. 이만규는 이 자리에서 조선교육령의 주요 내용에 대해 찬성 입장을 밝혔다. 물론 본인의 관심사인 가정 과목의 경우 생활상의 차이 등에서 오는 조선의 특수성을 인정해줄 것, 그리고 여자교육의 확대 등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는 이미 조선일보 투고(1938년 2월 25일), 좌담회(3월 17일) 등을 통해 내선일체 교육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바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이른바 흥업구락부사건이다. 1937년 7월 마지막 집회 이후 활동이 중단됐다가 갑자기 문제가 된 것은 1938년 7월에 시작한 국민정신총동원 정책의 영향이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시대 영합이냐 저항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어려움에 놓였다. 갈등하는 이들을 통제‧회유하기 위한 방식의 하나로 조작한 것이 이 사건이다. 이만규를 포함한 54명이 검거돼 조사를 받았다. 1938년 2월부터 조사가 시작됐고, 9월 3일 54명 명의의 전향성명서가 발표된 후 전원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신문에 게재된 전향성명서는 “민족자결의 미망을 청산하고 내선일체의 사명을 구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사건을 조사했던 2월부터 5월 사이 이만규가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에 기고를 하고, 좌담회에 참석해 총독부 교육정책에 대한 지지 발언을 했다는 점이다. 경찰서에 수감되고, 고문을 당했다는 일부 연구자들의 주장과는 상치되는 모습이다.
 

1938년 12월 12일 흥업구락부 회원일동은 기금 2400원을 서대문경찰서를 통해 국방헌금으로 바쳤다. 이들은 또 매달 10원씩의 국방헌금을 내겠다는 약속까지 했고 이것이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이 사건으로 이만규 등 17명은 교직을 떠나는 것으로 반성을 표시해야 했다. 이후 다시 배화재단 이사장 대리 겸 교두로 복귀하기까지 ‘가정독본’과 ‘조선교육사’ 자료수집과 집필활동에 매진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1939년 2월 10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정기총회에서 새로 선임된 이사 4명 중 한명에 포함됐다. 함께 선임된 인물은 김종우, 양주삼, 원한경 등 신사참배를 지지하던 친일 기독교인들이었다.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인 1942년 2월 3일 그는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전시가정시간, 질서 있는 생활을 하자’는 연설을 했다.
 

1941년 5월에는 ‘가정독본’이란 교재를 간행했다. 동아일보에 연재한 글을 묶은 책으로 그의 진보적 여성관을 보여주는 사례로 많은 연구자들이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여성들이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지켜야 할 도리를 설명하면서 “6년 전에 총독부에서 의례준칙을 발표하고 민간에서 실용하기를 장려하는 중”이라는 사실과 함께 이 장려의 영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가정독본’ 속 가례는 총독부 의례준칙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조선의 폐풍에 관한 지적은 의례준칙의 내용 그대로다. 그의 총독부 의례준칙 지지는 조선에서의 4대 봉사 제례를 비판하면서 일본식 영좌제도를 제안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 시기에 이만규는 창씨개명에도 동참해 李家萬珪가 됐다.
 

황민화시기에 보였던 이런 소극적이지만 타협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1942년 10월에 시작된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는다. 그는 오래전부터 조선어학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1929년 10월 31일에 열린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총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어 연구와 표준화 작업에 적극 참여했다. 이런 공로로 1933년 10월 ‘한글맞춤법통일안’ 확정을 기념하기 위해 열렸던 기념식에서 18명의 공로자 명단에도 포함됐다. 1936년 4월 11일에는 이희승을 이어 조선어학회 간사장이 됐다. 이런 중 발생한 사건으로 1942년 10월 18일 검거됐지만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수감을 면했다. 
 

해방과 함께 그는 이 땅에 진보주의 교육의 뿌리를 내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해방 후 최초로 열린 중등교육자대회에서 의장에 선출된 것을 보면 당시 교사들의 신망을 얻는 교육계의 지도적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양한 학술지에 진보적 민주주의 교육 사상을 전파하는 글을 게재했고, 이를 통해 식민지 교육 잔재 청산과 교육의 상품화 배제를 위한 실천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미국 중심의 새교육 운동과 융합할 수 없었다. 여운형과 함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기울이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1948년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 참석을 계기로 북을 선택했다.
 

이만규는 해방 직후에 집필한 ‘조선교육사(하): 신교육편’의 식민지 후반 교육파멸기를 마무리하며 식민지 치하에서의 ‘師道’(스승의 길)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그러면서 일제 강점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생활을 한 사람은 양심적인 교육자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양심적 교육자란 ‘민족적 양심을 지켜낸 교육자’가 아니라 민족적 양심을 지녔지만 시대적 상황으로 이를 온전히 지켜내기 어려웠던 불행한 교육자였다. 자신을 일컫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는 1948년 아내, 두 아들, 두 딸과 함께 북으로 갔다. 한글서예가로서 북쪽의 대표적 글씨체 각경체로 유명한 1914년생 쌍둥이 언니 ‘봄뫼’ 이각경과 남쪽의 대표적 한글글씨체 갈물체로 유명한 쌍둥이 동생 ‘갈물’ 이철경은 남과 북으로 흩어졌다. 남과 북을 대표하는 한글 글씨체는 이만규가 키운 쌍둥이 딸들의 업적이다. 막내 딸 ‘꽃뜰’ 이미경도 남쪽에 남아 한글서예가의 삶을 살았다. 그는 비록 남과 북에서 함께 존경을 받는 진보적 민족주의 교육자이지만 개화기, 일제강점기, 그리고 고통 가득한 분단시대를 힘겹게 살아내야 했던 이 땅의 불행한 교육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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