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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뉴스

잊지 말자, 그날의 역사 '8.15 광복'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
-식민 지배로 고통받던 우리 민족
-일제를 향한 끊임없는 저항 '독립운동'
-35년만에 맞은 해방의 기쁨 '광복'


1945년 8월 15일 정오, 낡은 라디오에서 일본 국왕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치직-! 치지직-!) 일본은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한다” 드디어 35년간 일본제국에 의해 고통 받던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그토록 염원하던 광복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리고 목청이 터져라 외쳤어요. “대한 독립 만세”

2019년 8월 15일은 우리가 일제로부터 독립한지 74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광복절은 피와 눈물로 얼룩진 식민 지배의 역사를 거쳐 맞이한 뜻 깊은 날인데요.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우리나라는 어떤 시대적 상황을 겪었으며, 우리 민족이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어떠한 투쟁을 전개해 나갔는지 알아봅시다. 


-이 기사는 <톡톡> 8월호 커버스토리에 12p분량으로 실린 내용입니다. 



광복 35년 전,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 

우리나라에는 왜 ‘광복절’이 있을까요? 그 이유는 지금으로부터 109년 전,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빼앗아 식민지로 삼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일본제국은 처음에는 우리나라에 와서 은근 슬쩍 우리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더니 자신들을 싫어하던 명성황후를 시해하고(1895년 을미사변) 우리나라의 외교권, 사법권, 경찰권 등을 차례로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마지막으로 우리의 국권까지 빼앗아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를 세계에서 없애버리고 ‘식민지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식민 지배를 하기 시작했어요.

일제는 우리의 국권을 찬탈한 이후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하기 전까지 무려 35년 동안이나 우리 민족을 신체적, 정신적으로 서서히 말살시켜 갔습니다. 이 기간을 바로 ‘일제강점기’라고 합니다.

일본은 우리 국민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민족의 고유성을 없애고, 인적, 물적 자원을 학살하고 약탈해 가는 등 우리 민족을 짓밟았습니다. 일제강점기는 3가지 통치 방식으로 시기를 구분할 수 있어요. 차례로 한 번 볼까요?



■ 일제강점기, 일제의 식민 통치 방식



식민 지배로 고통 받던 우리 민족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은 일제는 가장 먼저 경복궁의 여러 건물을 훼손하면서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라는 건물을 지었어요. 조선총독부는 식민 통치의 최고 기구로 입법, 사법, 행정, 군사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1910년대 ‘조선인이 일본을 두려워하게 만들자


1910년대 식민 통치 기간은 ‘무단 통치기’라고 불러요. 일본은 우리 민족이 식민 지배에 반발할까봐 두려워서 우리를 억압하고 공포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헌병경찰 통치’입니다. ‘헌병’은 군대 내의 경찰인데요. 이들에게는 재판에 넘기지 않고도 사람들을 가두거나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헌병에 의해 체포되고 처벌받았습니다.

헌병들은 일반인들의 일상생활까지 철저히 감시했습니다. 일본은 결사활동, 언론활동 및 고도의 기술을 습득할 기회도 박탈했어요.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돌아다녔어요. 또한 조선의 초등학생들은 일본 학생들과 달리 6년이 아닌 4년밖에 공부하지 못하도록 차별했습니다.

▲이완용, 일제에 국권을 넘겨준 대표적인 친일파
[출처=wikipedia]

1920년대 ‘조선인을 분열시키자
일제의 무단 통치 아래에서도 우리 민족은 나라 안팎에서 항일 투쟁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민족은 전 세계가 깜짝 놀랄 만큼 대규모의 저항운동을 일으켰어요. 바로 올해로 100주년이 되는 3·1운동이에요.

3·1운동을 계기로 일본은 통치 방식을 바꾸기로 해요. 비폭력 만세운동을 진행하는 우리 민족을 총과 칼로 잔인하게 진압해도 소용이 없고 세계 여론도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따라서 1920년대에는 우리 민족을 달래기 위해 ‘문화 통치’라는 이름으로 겉으로는 조선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며 우리들에게 이익을 주는 척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실제로 이 시기는 우리 민족의 단결과 독립운동을 막기 위한 시기로, 친일파를 길러 우리 민족을 이간질하고 분열시키려던 시기였어요. 따라서 ‘민족 분열 통치기’라고 불립니다.


1930년대 ‘조선인을 말살하자


1930년대가 되자 영토 야욕이 강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아시아 대륙을 침략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전쟁 보급 기지로 삼았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조선인들을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 시기를 ‘민족 말살 통치기’라고 하며 이때 펼쳤던 정책을 ‘황국 신민화’, ‘병참 기지화’라고 합니다.

일본은 우리 민족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는 ‘창씨개명’을 강요했고, 조선말과 조선글 대신 일본어만 사용하게 했어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매일 “우리는 황국 신민입니다!”로 시작하는 맹세를 외워야 했습니다.

전쟁을 하기 위해 일본은 조선에서 일본 군인에게 먹일 어마어마한 양의 쌀을 수탈해 갔어요. 또한 무기를 만들기 위해 공장을 세우고 우리의 지하자원을 캐갔는데, 이마저도 바닥을 드러내자 나중에는 집 안의 밥그릇, 숟가락까지 모조리 빼앗아 갔습니다.

일본은 남성, 여성, 아이 가리지 않고 전쟁 물자를 만드는 곳으로 끌고 가 죽기 직전까지 강제로 노동을 시켰어요. 물론 임금도 거의 주지 않았죠. 또 전쟁터에서 병사로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는 10대에서 40세까지 조선 여성들을 취직 시켜준다는 거짓말로 속여 군인들의 성 노리개로 만들었습니다.


일제를 향한 끊임없는 저항 ‘독립운동'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기 이전에도 대한제국은 일본, 청나라,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끊임없는 침탈을 겪어요. 그러다 결국 일본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죠.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여러 분야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독립운동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전개됐어요. 하나는 ‘무장 독립운동’, 다른 하나는 ‘애국 계몽 운동(실력 양성 운동)’입니다.



일제에 직접 무력을 행사한다 '무장 독립운동'


초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이 주로 비밀리에 움직이면서 활동했어요. 특히 국내에서는 독립운동단체가 일본에 발각돼 해체되는 경우가 많아서 간도, 만주, 연해주, 상하이 등지로 넘어가서 활동을 했답니다.

그러던 중,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을 이끌어 줄 중심기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결과 국내외 다수의 임시정부를 통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에 세워졌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헌법을 만들고 나라 안의 여러 독립운동 단체와 연락을 주고받았어요. 또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가들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습니다.

3·1운동 이후 무장 독립운동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에서 여러 독립군 부대를 조직했어요.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최정예 군인들도 길러냈습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내려온 독립군들은 일본 경찰서나 일본군을 공격했어요. 독립군을 만주 지역까지 쫓아 공격하던 일본군을 봉오동과 청산리 지역에서 크게 무찌르기도 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고, 이봉창, 윤봉길 의사는 폭탄을 던져 각각 일본 왕과 일본군을 처단하는 투쟁을 했습니다. 

일본의 언론 통제를 뚫고 세계에 전해진 우리 민족의 목숨 건 독립운동 소식은 세계 여러 나라에 깊은 감명을 주었어요. 3·1운동은 중국의 5.4 운동과 인도의 비폭력 독립운동에 영향을 끼쳤고, 여러 약소국들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을 교육해 실력을 키우자 '애국 계몽 운동'


독립군들이 나라 안팎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우리도 배워서 민족 의식과 실력을 높여야 한다’라며 추구했던 애국 계몽 운동이 전개됐어요.

주로 각종 학교를 세우고 신문을 발간해 민족을 교육하고 깨닫게 하며, 기업을 세워 경제적으로도 일본에게 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애국 계몽 운동 덕분에 우리 민족의 학력과 경제력이 많이 향상되었어요. 국산품을 사용해 민족 경제의 자립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1940년대에 들어서자 일제의 민족 말살 통치는 극에 달했어요. 하지만 우리 민족의 저항을 철저히 차단할수록 항일 독립운동의 불은 더욱 활활 타올랐답니다.

조선어학회는 한글을 만들어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박은식과 신채호는 한국사에 관한 책을 써서 우리 민족의 긍지를 살렸어요. 또한 윤동주, 이육사, 한용운, 심훈 등의 작가들은 시나 소설을 써서 항일 의지를 표현했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 35년 만에 맞은 해방의 기쁨 ‘광복’

1945년 8월 15일, 그토록 고대하던 기쁨의 날을 맞이합니다. 바로 ‘광복’입니다. 광복은 한자로 빛 광(光)자에 회복할 복(復)을 써서 ‘빼앗긴 주권을 도로 찾음’을 의미해요. 35년간의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한국 정부는 광복절을 국경일로 지정했답니다.

우리가 광복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에 패배했기 때문인데요. 전쟁에서 진 나라가 다스리던 식민지 국가는 자연히 원래의 자주독립 상태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어요.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는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광복을 맞이하지 못한 것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했어요. 이미 미국, 영국, 중화민국(대만) 세계 지도자들이 모인 카이로회담(1943년)에서 수장들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합의를 했습니다. 

1945년 9월에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일본군을 공격할 대규모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를 실행하기도 전에 일본이 먼저 항복하고 말았으니까요.
그러나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절실함 하나만으로 끊임없이 투쟁을 벌였던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광복이 더 늦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노력과 민족 정신은 광복 후 오늘날까지 남아 나라에 큰일이 닥칠 때마다 역경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었던 큰 힘이 됐습니다. 8월 15일, 광복의 기쁨을 되새기며 우리 민족의 정신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 <톡톡> 8월호 해당 페이지 안내 

*에듀진 기사 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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