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는 색과 빛 사이에서 노닐 뿐이다”

[김택상]
살아 숨 쉬듯 일렁이는 물빛 구현
수년 걸친 제작 기간, 물에 담가 색상 층위 쌓으며 시간성 입혀
서울서 16년 만에 개인전 ‘색과 빛 사이에서’
내년 1월 10일까지 서울 창성동 리안갤러리

< Breathing Light-Young Azalea(여린진달래숨빛) > 214x210cm Water, Acrylic on Canvas 2014~2019 /리안갤러리
< Breathing Light-Violet Emerald > 132x123cm Water, Acrylic on Canvas 2018~2019 /윤다함 기자
 
전시장 벽에 걸린 천이 발광(發光)한다. 무슨 조명이라도 비춰서 그런 것인가 싶어 다가가 보지만 조작은 없다. 그림은 살아 숨 쉬는 듯 여전히 화면에서 스스로 빛을 내뿜는다. 김택상(61) 청주대 비주얼아트학과 교수의 작업에서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시차(時差)다. 물에 잠기는 표면의 면적과 침전되는 시간을 조절하면서 건조하고 색상 층위를 겹겹이 쌓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그 사이사이에는 기다림이 존재한다. 끝없는 기다림의 과정을 통해 색이 서서히 익어가게끔 내버려 둘 줄 알아야 장(醬)맛과도 같이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빛깔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화초 키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무작정 물 많이 준다고 잘 자라나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뿌리가 썩는 역효과를 부르기 마련이죠. 적정량의 물을 주고 꾸준히 햇빛을 쐬어주며 스스로 크게끔 놔두는 법을 알아야 해요.”
 
철판 위에 천을 올려 미량의 아크릴을 희석한 물을 붓고 수성 캔버스가 남실남실 잠기도록 해 용해된 고운 물감 입자가 천 깊숙이 침전되도록 한다. /김택상
 
완만하게 오목한 철판 두 개를 맞붙여 경사를 만든 뒤, 그 위에 천을 올려 미량의 아크릴을 희석한 물을 붓고 수성 캔버스가 남실남실 잠기도록 한다. 용해된 미세한 물감 알갱이는 채로 거른 것처럼 입자가 매우 고와 물감을 칠한 것과는 달리 그윽하고 부드러운 색조가 캔버스 깊숙이 침전되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작업 과정을 설명하던 그는 자신의 작품을 발효음식에 빗대었다. “제 작업은 발효음식점에서 음식 만들어내는 것과 비슷하달까요? 선대부터 내려온 씨간장이 담긴 장독 안에는 수십 년, 수백 년 전의 효소가 들어있어요. 그 장으로 만든 음식의 맛이 다른 까닭은 바로 그 효소 때문이라고들 하죠. 장을 담그듯 캔버스 천에 색과 빛깔을 담갔습니다. 캔버스천 위에 작업을 거듭하며 시간을 쌓으면서 익히고 발효시켜왔죠.” 마음 내킬 때마다, 환경이 뒷받침될 때마다 캔버스 앞으로 다가갔고 그때의 감정과 시간을 오롯이 모아 덧놓기를 거듭했다. 발효가 일순 이뤄질 수 없는 것처럼 김택상의 작업 또한 시간의 축적 속에서 그만의 독특한 맛이 배어 나온다. 작업마다 제작기간은 짧게는 1년, 길게는 20년에 이른다. 팔락이는 얄따란 천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포개져 응축돼 있다.
 
캔버스 표면에 색을 겹겹이 칠해나가는 서구의 회화 실현 방식에서 탈피해 마치 캔버스 그 자체의 자연색이자 숨 쉬듯 살아 있는 빛을 담아 표현해왔다. 이러한 방법론을 작정하고 만들었다기보단 지난 30년 화업 과정 속에 자연스레 ‘밀당’을 반복하며 구축된 거라고 했다. 계기는 ‘물빛’이었다. 물을 머금은 바로 이 빛의 색을 작품으로 구현하기 위해 다채로운 양식을 실험하고 시도했고 본래는 색이 없는 물을 이용해 빛을 산란시키는 물빛을 구현하는 데 이르렀다. 층층이 얇게 입힌 물감이 마르면서 천 표면이 수축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틈이 생기고 미세한 가루 입자 간에 나노 크기의 공간이 생성되는데, 그 사이사이로 새든 빛이 산란하면서 화면 밖으로 스며 나와 발광하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 Breathing Light-Apricot > 183x125cm Water, Acrylic on Canvas 2018~2019 /리안갤러리
 
그는 올해 초 리안갤러리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어떤 비전을 가졌는지, 미술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무엇인지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대사 이후 우리는 스스로 미술사를 쓰고자 하는 시도조차 생각지 못했던 것 같아요.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가기보단 남이 하는 걸 따라 하는 데 익숙한 습성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김택상은 더욱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단순 화상(畫商)을 넘어 국제 미술계에 한국미술을 알리고 자긍심을 높이는 역할에 뜻을 같이할 화랑을 탐색한 끝에 리안갤러리를 선택한 이유다. 따라 하는 데 있어선 이미 1등이지만, 모방으로는 영원히 1등이 될 수 없음을 되짚으며 국제무대에 한국 작가를 내보내기 위한 투자가 뒷받침돼야 함을 강조했다. “우리는 이미 흉내 내는 데는 1등이지만 서구 개념미술에서의 1등은 영원히 될 수 없을 거예요. 결국은 서구의 그것을 따라 한 후발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지금이야말로 우리 고유의 미술사를 써나갈 적기입니다.” 리안갤러리는 지난해 김택상, 김근태, 이진우, 남춘모 등의 작가를 한데 모아 ‘후기단색화’로 명명하고 전시를 개최하는 등 한국 미술의 토양과 입지를 다지고자 했다.
 
교수직 정년을 5년 앞두고 최근 학교에 명예퇴직을 신청한 배경도 향후 행보에 더욱 힘을 싣기 위함이다. “제 작품이 하나의 메시지로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도록 전업 작가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작가로서 더욱 인정받는 수밖에 없겠죠. 그렇기에 온전히 작업에 전념하고자 합니다.”
 
‘색과 빛 사이에서’전(展) 전경 /윤다함 기자
 
김택상이 자신만의 고유한 실현 양식과 미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구현한 연작 <Breathing Light> 20여 점을 내걸었다. 리안갤러리와 전속 계약 후, 서울에서 16년 만에 마련된 개인전이다. ‘숨 쉬는 빛’이라는 타이틀처럼 김택상의 회화는 실제로 살아 숨 쉬는 듯 빛에 따라 화면이 일렁인다. “색이란 빛에 의해 생기는 물리적인 현상이죠. 빛의 굴절과 회절 등을 통해 비로소 우리 눈에 보이게 되는 것이잖아요. 저는 그저 색과 빛 사이에서 노닐 뿐이에요.” 2020년 1월 10일까지 서울 창성동 리안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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