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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뉴스

[서민수 경찰관의 요즘 자녀學] 아이들은 왜 그렇게 귀찮아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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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학부모 교육 시간에 있었던 한 어머니의 질문에서 가져왔습니다. 다소 생뚱맞고 모호해 보이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 자녀의 행동에 존재하는 이 ‘귀차니즘’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의 노력이 늘 벽에 부딪히는 순간은 자녀가 부모의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을 때 생깁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 성장에 옳다고 판단하거나 또는 자녀의 학습에 도움이 된다고 확신이 들면 의사전달이 더욱더 견고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자녀는 이런 부모의 마음은 몰라주고 여지없이 기대보다 못 미치는 행동을 해서 고민을 안겨 줍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일상에서 보여주는 우리 자녀의 ‘귀차니즘’입니다.

자녀의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은 다양합니다. 그중에서도 부모가 보여주는 ‘미러링(Mirroring)’은 자녀의 행동에 크게 영향을 주는 절대적 요소라 볼 수 있고, 사회 문화적인 학습을 통해 획득한 소프트 스킬(Soft Skill) 또한 빠뜨릴 수 없는 충분한 요소입니다. 특히, 스마트폰이 가르쳐 준 디지털 기술은 우리 자녀를 더 귀찮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렇게 보면, 보이는 것만을 교육으로 받아들이는 자녀 세대에게 ‘굳이 움직이지 않고도 무엇이든 해결 가능한 시대’라는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귀찮다’와 ‘게으르다’라는 개념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귀찮은 것’과 ‘게으른 것’을 같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귀찮다’는 사전적 의미는 ‘마음에 들지 아니하고 괴롭거나 성가시다’는 뜻이고, ‘게으르다’는 ‘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성미나 버릇’을 말하는 것으로 둘은 엄연히 다른 개념입니다.

즉 ‘귀찮다’는 의미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미루려는 습성이 있는 것’이고, ‘게으르다’라는 의미는 ‘아예 일하겠다는 의지 자체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녀의 ‘귀차니즘’보다는 ‘게으름’에 대한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또 반대로 자녀의 일상적인 ‘귀차니즘’으로 인해 부모와 자녀 간 생기는 다툼은 충분한 타협으로도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쉬운 예로, 자녀가 부모와 어떤 약속을 했는데 지키고 싶지 않거나 미루고 싶은 마음은 ‘귀차니즘’에 속하지만, 약속 자체를 하지 않는 마음은 ‘게으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약속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귀차니즘’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귀차니즘’에는 약속에 대한 ‘의지’가 존재하는 반면 ‘게으름’에는 ‘의지’ 자체가 없다는 게 중요한 차이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게으름’은 타박의 대상이자 체계적인 행동 수정을 해야 하는 단계이지만 ‘귀차니즘’은 자녀의 보편적인 특징이며, 부드러운 훈육으로도 충분히 행동 수정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귀차니즘’을 가진 아이들에게는 행동을 구별 짓는 ‘수준’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자녀의 행동은 호기심에서 시작된 흥미가 곧 행동의 동기가 되듯이 부모의 제안과 지시가 자녀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으면 자녀의 적극적인 행동을 끌어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자녀의 ‘귀차니즘’은 자녀의 ‘이익’과도 연결할 수 있어서, 제안이 들어왔을 때 이것저것 판단해서 자신에게 ‘뚜렷한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굳이 적극적인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요즘 아이들의 뇌 구조입니다.

그렇다면 이 ‘귀차니즘’에 영향을 주는 자녀의 수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제가 만난 아이 중에는 체계적인 학습을 통해 지적 수준이 높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대중매체와 스마트폰에서 제공하는 콘텐츠의 영향과 자녀 주변에 존재하는 ‘사회관계망’에서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청소년의 수준이 또래보다 높은 연령 집단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국내·외 연구 결과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해법은 자녀에 대한 ‘측정과 적용’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녀가 성장할수록 부모는 자녀를 얼마나 잘 측정하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질문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아이들은 우리 부모 세대보다 수준의 편차가 3년 이상의 차이를 드러냅니다. 쉽게 말해, 지금의 자녀가 초등학교 6학년이라면 부모 세대의 중학교 3학년 때와 같은 수준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측정된 수준을 기준으로 자녀를 대해야 합니다. 수준을 벗어난 부모의 지시와 타협은 자녀 입장에서 보자면 설득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고민을 가진 청소년을 만나기 위해 한 달에도 몇 번씩 편도 200km가 넘는 거리를 운전해 가면서도 아이들의 ‘귀차니즘’ 때문에 못 만나고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에게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본 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니까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아이들의 ‘귀차니즘’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비난하게 되면 그나마 있던 ‘귀차니즘’마저 어느 순간 ‘게으름’으로 바뀌고, 결국 부모가 감당할 수 없는 무력감이 아이를 덮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동학자이자 철학자인 칼 로저스는 “자녀를 사랑하려면 완벽한 아이에 대한 환상을 버려라”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는 항상 자녀의 행동을 보면서 “어디에서 실수한 거지?”라는 질문을 반복해야 합니다. 자녀의 ‘귀차니즘’ 또한 우리 자녀가 가지는 청소년기의 보편적 특징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조금 유별나게 귀찮아한다면 그것은 부모의 숙제이지, 결코 아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숙제가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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