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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뉴스

[서민수 경찰관의 요즘 자녀學] 아무리 그래도 ‘놀이터’는 지켰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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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게임을 많이 한다는 이유로 부모님에게 등짝 스매싱을 당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또 조금 전에도 게임을 많이 한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야단을 맞고서 하소연을 보내온 아이가 있었습니다. 비단 이 아이만의 하소연이고, 이 아버지만의 야단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게임에 대하여 아이는 억울하다 하고, 부모는 속이 터진다고 하니 우리 아이들의 ‘놀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인 존 로크는 “많은 아이가 어리석은 장난에 푹 빠지거나 시간을 무의미하게 허비하는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의 호기심이 좌절되고 탐구심이 무시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부모에게 시간 낭비로 보이는 자녀의 ‘인터넷 게임’이 자녀 스스로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게 만듭니다.

지금 자녀의 ‘놀이’가 되어버린 ‘인터넷 게임’은 정확하게 ‘일렉트로닉 스포츠’, 즉 ‘e스포츠’라고 부릅니다. 사회용어로 완전히 정착되지는 못했지만, 엄연히 현행 법률에는 ‘e스포츠 진흥에 관한 법률(약칭 e스포츠 법)’이 작동하고 있고, 또 각종 e스포츠 대회 홍보를 통해 이미 자녀 세대에게 ‘확실한 놀이’로 자리를 잡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인터넷 게임’을 우리가 알고 있는 정상적인 ‘놀이’로 선뜻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세계보건기구(WHO)가 게임중독을 ‘세계 질병’으로 지정한 것도 크게 신경이 쓰이는 부분입니다.

‘놀이’가 우리 삶에 중요한 역사적 행위라는 건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가 쓴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에서도 잘 설명하고 있고, 또 현대 교육학에서도 ‘놀이’는 여전히 자녀의 건강한 신체와 정서를 갖도록 돕는 기능을 하며, 학업의 근력을 기르고,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다양한 사회 학습을 배울 기회를 제공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가 하는 ‘인터넷 게임’이 과연 건강한 신체와 정서를 길러줄 수 있을지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고 또, 학업과 놀이 사이에 놓인 경계선 때문에 철학적으로 빈곤해지는 게 지금의 자녀인 것을 우리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자녀 세대에게 ‘놀이’는 ‘인터넷 게임’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지만, 부모는 ‘인터넷 게임’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는 게 큰 차이입니다. 또 자녀는 부모의 눈치 때문에 놀고 싶어도 자유롭게 놀지 못하고, 그래서 학업이 놀이에 봉사하거나 놀이가 학업에 봉사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는 실정입니다.

따지고 보면, 부모의 기대는 ‘놀이가 학업과 성장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으면 된다’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안은 생각보다 쉬울 수 있습니다. 즉, ‘인터넷 게임’이 자녀의 성장과 학업을 방해하지 않고 ‘놀이’로서 순수한 기능만 해주면 된다는 게 부모의 설득입니다. 더구나 자녀에게 ‘놀이’란 정상적으로 작동만 하면 자녀의 성장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기능까지 할 수 있는데 지금의 ‘인터넷 게임’은 그 역할을 전혀 못하고 있다는 게 부연 설명입니다.

저도 부모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현장에서도 많이 보았지만 ‘놀이’가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아이는 비교적 안전한 모습입니다. “놀이는 일반적인 규칙과 규율을 뛰어넘어 새롭게 존재하는 마법 같은 영역을 제공한다.”는 요한 하위징아의 주장처럼 ‘놀이’를 통해 자녀는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이렇게 구축된 알고리즘은 자녀가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마주했을 때 안전한 선택을 하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놀이의 부재’입니다. 자녀의 ‘놀이’에 대한 위기론이란 결국, 놀이의 환경이 ‘부재한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으며, 어느 순간 놀이터가 사라지고 학교 운동장의 정문이 잠기면서 부모가 생각하던 아이들의 ‘놀이’는 이제 기대하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놀아야 부모가 만족하는지 알려달라고 합니다.

지금에 와서야 어른들은 한동안 놀이터가 위험하다고 떠들기만 했지, 자녀의 ‘놀이터’를 대신할 대안은 미처 마련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아이들은 ‘인터넷 게임’이 재밌고 좋아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다른 대안이 없어서 ‘인터넷 게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인터넷 게임’이 자녀 세대의 ‘확실한 놀이’가 되었다는 것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보다 지금은 현실적으로 자녀를 위해 새로운 ‘놀이’에 대한 ‘방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초점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뀐 ‘놀이’ 문화에 대한 인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인터넷 게임’에 대한 자녀의 ‘놀이’를 ‘여가’로 바라볼 수 있는 태도의 변화입니다.

‘여가’란 본래 고대 그리스 시대 ‘학교(School)’라는 의미에서 유래했고, 또 지금은 인문적으로 우리의 삶을 푹신푹신하게 해주는 ‘쿠션’ 같은 역할을 하고 있듯이 자녀가 ‘인터넷 게임’을 쫓기듯이 눈치 보며 하도록 두는 것보다 오히려 자녀의 학업을 보충하는 ‘여가’로 받아들이고 이를 인정해주는 부모의 긍정적인 태도가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결국, 이러한 변화는 우리 자녀에게 신뢰로 해석되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자제력’을 갖추는 데 도움을 줍니다.

부모가 ‘인터넷 게임’을 단순히 쓸모없는 행위로 간주한다면 자녀도 그 순간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자녀의 성장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이러한 불일치는 여전히 부모와 자녀 간 발생할 수 있는 세대의 전쟁으로 이어져 한동안 사그라지기 어렵습니다.

결국, 자녀의 ‘놀이’가 못마땅하거나 걱정된다면 ‘인터넷 게임’을 무조건 부정하기보다 자녀와 함께 ‘대안’을 찾아봐 주세요. 당연히 ‘인터넷 게임’을 통제하고자 한다면 같은 수준의 대안을 반드시 제시해야 하며, 대안이 없다면 ‘인터넷 게임’ 자체에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로 글을 마쳐야겠습니다. 이것은 아쉬워도 너무 아쉬운 저의 속마음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놀이터’를 지켰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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