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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뉴스

[인문 다이제스트 | 미술산책 ] 검은 피카소 '장 미쉘 바스키아'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천재 화가

*무제(추락하는 천사) [사진 출처=basquiat.com]


맑고 푸른색을 칠한 바탕 위에 검은색 페인트로 마구 휘갈겨 그린 그림 속 얼굴은 어떻게 보면 화가난 것 같기도, 어떻게 보면 신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단순히 낙서처럼 보이는 이 그림은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무려 1,248억 원이라는 금액에 낙찰돼 미국 작가의 작품 중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이 작품을 그린 사람은 바로 검은 피카소라고 불리는 장 미쉘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 그의 작품의 값어치는 지금도 계속해서 오르고 있는 중이다. 도대체 어떤 매력 때문에 그의 작품이 이토록 사랑받고 있는 것일까?


-이 기사는 <나침반> 2월호 '인문 다이제스트'에 6p분량으로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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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의 슬픔을 위로해준 미술


바스키아는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부유한 아이티 출신 이민자인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바스키아는 어릴 적부터 책을 읽고, 사물을 관찰하고, 글을 쓰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영재성을 타고난 그는 영재들을 위한 시티애즈스쿨(City-as-School)에 입학했다.


*장 미쉘 바스키아 [사진 출처=sleek-mag.com]

어머니는 바스키아가 그림에 대한 열정을 계속 가질 수 있도록 물질적, 금전적 지원과 함께 옆에서 든든한 조력자가 돼 주었고, 메트로폴리탄, 모마, 브루클린 등 뉴욕에 있는 멋진 미술관에 데리고 다니며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다. 그러던 중 바스키아는 미술관에서 본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바스키아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머니와 떨어져 살게 된다. 그 후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고독하고 상처가 깊은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응어리진 슬픔을 풀어냈다. 바스키아는 사춘기에 접어들어 아버지와 갈등이 심해지면서, 자주 가출을 했고 그림을 그리고 노숙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붙잡혀 돌아오기 일쑤였지만 그럴 때마다 번번이 뉴욕의 거리로 다시 뛰쳐나갔다.



‘세이모’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바스키아


바스키아는 점점 더 그림에 빠져든다. 그는 17세부터 친구 알 디아즈와 ‘세이모(SAMO)’라는 크루를 결성했다. 세이모는 ‘SAme Old Shit(흔해빠진 것)’의 줄임말로 바스키아와 친구들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였다. 그들은 스프레이, 마커, 오일 크레용을 가지고 뉴욕 소호 거리 외벽을 도화지 삼아 낙서 그림을 그리는 ‘그래피티 아트(Graffiti art)’를 개척한다.


▲ 알폰소 왕, 1983 [사진 출처=americansuburbx.com]

바스키아는 그림을 그리고 나서 꼭 SAMO라는 서명 혹은 왕관 모양을 그려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는 그림에 종종 저작권을 뜻하는 ‘ⓒ’(copyright) 기호를 적기도 했는데, 이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과 세상에 존재하는 흑인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사람들은 점차 뉴욕 거리에 휘갈겨진 낙서들이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누가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 SAMO가 무슨 뜻인지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이모는 ‘유명세’에 대한 시각 차이를 계기로 멀어지게 된다.

바스키아는 지금보다 더욱 유명해지길 원했지만, 디아즈는 영원히 익명의 화가로 남고 싶어 했다. 결국 세이모는 해체됐고, 거리 곳곳에는 ‘세이모는 죽었다(SAMO IS DEAD)’라는 낙서가 남게 되면서 그들이 더 이상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이 공식화됐다.


낙서에 담긴 비판 의식


다른 그래피티와 달리 바스키아의 그래피티가 작품으로 주목받고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얼핏 보면 다른 낙서 그림들과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는 바스키아의 그림에, ‘인간에 대한 탐구’나 일방적인 대중의 사고를 비판하는 ‘비판 의식’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로 자신의 정체성인 흑인과 자라오며 겪었던 인생의 경험을 주제로 흑인을 향한 인종차별 행태를 비판했으며, 1980년대 미국의 자본주의 세태, 자유를 향한 갈망,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 죽음 등 그만의 철학을 담아 작품 활동을 해나갔다.

바스키아의 작품에는 해골 형태의 인물이나 신체 부위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작가가 8살 때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어머니가 선물해 준 해부학 교과서 <그레이의 해부학 (Gray’s Anatomy)>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스키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신체 드로잉에도 매료돼 그의 드로잉 책을 독학하기도 했다.



바스키아의 삶은 ‘앤디 워홀’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
[사진 출처=sleek-mag.com]

바스키아는 어느새 예술계의 떠오르는 신인에서 엄청난 스타가 됐다. 그가 이처럼 유명한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스승이자 친구이며 조력자였던 ‘앤디워홀’을 만났기 때문이다. 워홀은 당시 ‘팝아트의 교황’으로 불리며 대중 미술과 순수 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미술뿐만 아니라 영화, 광고, 디자인 등 시각예술 전반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주도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 워홀은 바스키아에게 정신적 지주 같은 존재였다. 당시 스타 중의 스타였던 워홀은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보고 마케팅을 이용해 바스키아의 몸값을 끌어올렸다. 바스키아의 그림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비싼 가격에 팔리게 되고 이들은 예술적 성향뿐만 아니라 각자의 관심과 취향까지도 공유했다. 바스키아는 승승장구하게 된다.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살다 가다


▲ 무제 [사진 출처=artnews.com]

두 사람은 1985년 뉴욕에서 대규모로 공동 전시를 개최했지만 생각보다 인기를 끌지 못했고, 이를 계기로 서서히 멀어지게 된다. 그런 가운데 1987년 앤디 워홀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바스키아는 큰 충격을 받는다. 얼마 안 있어 그 역시 결국 약물 중독으로 27살이라는 나이에 요절한다.

바스키아의 애인이었던 수잔이 바스키아를 위해 장례식장에서 낭독한 시처럼, 바스키아는 이 세상을 불꽃처럼 살다 갔고, 그 짧은 삶을 살며 남겼던 불씨는 아직도 뜨겁다. 바스키아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는 십 년이 채 되지 않지만, 그동안 남긴 3,000여 점의 스케치와 작품들은 그의 작품을 사랑하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 <나침반> 2월호 해당 페이지 안내  


*에듀진 기사 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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