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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수 경찰관의 요즘 자녀學]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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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부모로부터 ‘자해’를 하는 자녀의 상담 때문이긴 했지만, 이토록 '관심'이라는 주제로 생각을 많이 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말은 곧 '자해'의 연관 검색어 중 최상위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관심'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덧붙여 관심을 받기 위해 '잘못된 표현'이라는 비도덕적 해석과 깊은 상관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집필에 앞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부분은, 일단 “자해라는 단어를 부모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할까?”와 “자해라는 주제를 통해 부모가 아무 문제도 없는 자녀에게 오히려 과잉반응을 보여서 자칫 자녀의 일상을 더 휘청거리게 만드는 건 아닐까?”라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언어를 순화한다는 것 또한 실체를 전달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게으름'이나 '비겁함'일 수도 있고, 또 사실의 무게를 가벼이 만드는 작용도 할 수 있어서 결국, "자해는 상처다"라는 메타포를 포기하고 '자해(自害)' 그 자체의 본명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지금, 자녀 세대에게 불편한 현상이 되어버린 '자해'가 우리 부모에게 생소한 신드롬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아이하고는 거리가 먼 주제라고 외면부터 하는 건 오히려 위험하고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장 아이들이 즐겨 찾는 소셜미디어에서 '#자해'라고 검색만 해도 수백, 수 천장의 연관 이미지가 속출하고 있고, 내용 또한 아무런 필터링 없이 우리 아이들에게 노출되고 있어서 차마 직접 보고 확인하라고 권유하기도 불편한 입장입니다.

분명한 것은, 자녀 세대 중에 '자해'를 저지르는 일명 '자해러'가 많은 것이 사실이고, 그만큼 우리가 공감하지 못하는 자녀 세대의 스트레스 영역 또한 부모 시절과는 다른 범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 현직 교사는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자해’ 현상이 심각하여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직관적인 글까지 올리기도 했습니다.

'자해'라는 용어가 우리 사회에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초, 당시 대학입학 예비고사로 스트레스를 앓고 있는 고3 수험생들을 가리켜 ‘고3병’이라고 부르면서, ‘고3병’의 증상으로 소개된 것이 바로 ‘자해’였습니다. 이후 1990년에는 초등학생 어린이가 불량배로부터 지속적인 폭행과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자해’ 한 사건이 드러나면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자해(自解)’는 '자해(自害)'라는 잘못된 명제를 만들어내며 지금의 자녀 세대에까지 도착했습니다.

'자해'의 방식은 아이가 겪고 있는 상태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머리카락 말기’, ‘손톱 뜯기’, ‘피부 긁기’ 같은 다소 경미해 보이는 방식부터 ‘피부 찌르기’, ‘얼굴 때리기’, ‘머리카락 뽑기’와 심지어 칼이나 송곳 같은 날카로운 물건으로 ‘살갗을 베는 행위’까지 생각만 해도 아찔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지난해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에서 발표한 조사에서도 '자신을 깨물었다.'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 이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았다.’, ‘고의로 자신을 때렸다.’, ‘상처가 날 정도로 피부를 긁었다.’ 순으로 응답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스트레스를 받는 여자아이에게 흔히 나타나는 ‘아토피’가 병리적 증상인지 아니면 ‘자해’의 흔적인지는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녀 세대의 ‘자해’ 문화에서 눈여겨볼 것은 ‘전염성’과 ‘중독성’입니다. 소셜미디어가 일상이 된 자녀 세대에게 ‘자해’를 통해 관심을 받는 의례는 너무 쉬워졌고, 더구나 유혹적입니다. 게다가 ‘자해’를 그들만의 소속감을 상징하는 데 이용하는가 하면, 일부는 아이들 세계에서 다른 아이들과 구별 짓기 위해 이용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반복적인 신체 손상은 통증 민감도를 낮추는 효과까지 있어서 아이가 빈도를 늘리거나 강도를 올리는 경우까지 흔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해’ 행동은 중간에 그만두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제때 제대로 된 도움을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아이들은 왜 ‘자해’를 할까요? 일단, ‘자해’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아이에게 또래 관계나 학교생활 그리고 가정에서 ‘꽤 심각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심각한 일이란,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일이며, 해결을 위한 주변의 도움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아이는 고립된 방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패닉 상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무관심’, ‘무기력’, ‘무방법’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자신에게 잘못을 돌리고, 자신에게 벌을 가하며, 또 자신의 상태를 알리는 신호를 만드는 것이 최선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녀 세대에게 '자해'는 구분 선이 없습니다. 대체로 여학생들이 많기는 하지만 지금은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성별 연령을 구분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이러한 '자해'는 비행 행동과도 연관이 없어서 우리 자녀 모두에게 해당할 수 있는 아찔한 문제라고 이해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는 ‘자해’하는 아이의 행동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은닉을 잘하는 아이들의 특성을 고려하면 쉽지는 않겠지만 그럴수록 일단, 아이가 패션이라고 주장하며 긴 소매 옷 같은 계절에 맞지 않는 복장을 선호하는 것을 눈여겨 봐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손목 밴드 같은 것을 계속 붙이거나 또 다쳤다며 붕대를 감는 행동도 눈여겨 봐주시고, 조금 자해가 심하다면 송곳이나 면도날 같은 날카로운 물건을 소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밖에 욕실이나 화장실에서 오래 있는 아이라든지 또는 ‘자해’에 대하여 툭툭 이야기를 던지며 관심을 보이는 아이에 대해서도 주의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아이의 행동에서 ‘자해’가 의심이 된다면 부모로서는 이성적으로 접근하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발견 단계에서 부모의 감정적인 대처는 절대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꼭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아이의 ‘자해’ 행동을 발견했다면 담임교사와 상담을 진행하는 것이 절차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담임교사나 전문의와의 상담과는 별도로, ‘자해’를 마주하는 부모의 태도는 ‘경청’과 ‘공감’이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경청’이란 말 그대로 들어주며 반응해주는 태도를 말합니다. 특히, 이야기의 주도권을 절대 부모가 빼앗아 와서는 안 된다는 뜻이며, 편견은 물론 우리 아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도록 같은 감정을 보여주는 것이 절실합니다.

『피로 사회』의 저자 한병철 교수는 "셀카를 찍거나 자해를 하는 것은 모두 공허해진 마음에서 비롯된 행위"라고 했습니다. ‘자해’를 이해한다는 건, 빛도 들어오지 않는 고립된 방에서 홀로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아이를 상상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자해’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건, 결국 부모가 창문을 만들어 주는 일이며, 방문을 만들어 우리 아이를 고립된 방에서 꺼내주는 것과 같습니다. 맞습니다. 부모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손을 내밀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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