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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뉴스

[다정쌤의 미국생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자, 나무의 삶이 보였다

[에듀인뉴스] 동반휴직으로 미국에서 1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학교생활과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이자, 커다란 쉼표 같은 시간이다. 숨 가쁘게 달리다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다. 거리를 두고 보면 놓쳤던 것이 보이기도 하고, 다른 각도의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미국에서의 시간이 그런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교사는 가장 다양한 경험이 필요한 직업군이다. 학교로 제한된 공간을 벗어나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이 더 선명하게 보일까?  직접 삶으로 미국 문화를 경험하며 ‘차이’에서 파생되는 새로운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그 생각을 확장 시키는 과정을 공유하고 싶다.


밥로스 아저씨의 그림 같은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 오레곤. 나무가 가장 많은 이곳은 다양한 종의 나무를 만날  수 있다. 코로나 확산이 심해지면서 나무에 마스크를 써 달라는 안내가 걸려있다.(사진=이다정 교사) 

[에듀인뉴스] 미국 오레곤주는 나무가 가장 많은 곳으로 광대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주의 절반가량이 산림으로 덮혀있어 미국 안에서도 사람들이 ‘오레곤주’ 하면 ‘나무’를 떠올린다고 한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많은 나무를 보고, 또 그런 나무와 함께 살기는 처음인 듯하다. 


집 앞 숲은 까마득 높은 나무 덕에 조금만 들어가도 원시림 속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 아침에 창을 열면 나무 향이 스민 공기가 밀려들어 온다. 그렇게 후각으로 나무를 만나고, 눈동자에 아른거리는 녹색, 시각으로 나무를 만난다. 그리고 청각으로도 나무를 만난다. 


지금 살고 있는 나무로 지어진 2층 집은 걸을 때마다 삐그덕 삐그덕 소리가 난다. 여기저기에서 끼이익 거리는 소리까지. 처음엔 ‘집이 낡아서 그런가?’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미술관에 갔을 때 그 곳 바닥에서도 집과 같은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낡아서 그런 것은 아니구나...’ 안심하게 되었다. 


나무는 소리로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사람보다 나무를 더 많이 만나며 살고 있다. 사실 오레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기 전부터 이미 거리두기를 하며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넓은 땅, 숲이 많은 이곳은 거리에서 사람과 마주칠 일이 적기 때문이다. 가끔 마주치는 사람은 조깅을 하거나 개 산책을 시키는 사람들이다. 온갖 편의시설이 집 앞에 갖추어져 있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한국과 달리 조용하고 한적한 이곳.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한국과 다른 점이 많아 처음엔 이상한 나라에 온 듯 낯설고 어색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편했다. 그러나 서서히 익숙해지며 이곳의 여유로운 리듬을 따라가게 되는 것 같다. 주변에 가득한 나무들과 함께 말이다.
 
삶의 템포가 빠를 땐 성장속도가 느린 식물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가장 식물을 많이 관찰 했던 때는 노량진에서 임용고시 공부를 할 때였다. 독서실 칸막이 작은 공간에 놓아두었던 장미허브. 매일 그곳에 앉아 식물이 조금씩 자라는 모습을 보았다. 


한 뼘 세상 속에서 누리는 해맑은 기쁨이었다. 시험 날까지 더디게 흘러가는 수험생활은 힘들었지만, 가장 많이 식물이 크는 과정을 관찰했고, 또 가장 많이 내 삶에 대해 생각했던 시간이었다. 


아이러니하다. 미국이란 광활한 땅에 와서 좁디좁은 독서실 한켠을 떠올리게 되었으니 말이다.


왜일까? 생각해 보니 지금과 고시생시절의 공통점 때문인 것 같다. ‘안으로 향하는 에너지’를 경험하는 시간이라는 것!
 
삶의 지평을 넓히고자, 경력도, 월급도 포기하고 선택한 휴직. 내려놓는 연습을 하겠다고 했지만 솔직히 넓은 곳에서 더 많이 채워 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지금, 나는 마치 그 독서실에서 식물을 바라보듯 집에서 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창 밖 나무를 바라보며,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어 두었던 책을 한 권 한 권 꺼내어 읽어본다. 비록 몸은 집에 갇혀 있지만, 지금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잡지 않았을 것 같은 책을 읽으며 내면의 깊숙한 곳을 살펴본다.


‘그래, 이 시간에 내 삶의 든든한 골조를 세워보자.’


봄이 오면서 세상은 눈부신 연두빛으로 변했다. 집 근처에 오래된 나무들은 집 앞까지 뿌리를 뻗어 낸다. 종종 아스팔트 바닥도 뚫고 뿌리를 드러내기도 한다.(사진=이다정 교사)

무언가를 채워 넣기 전에 좀 더 섬세하게, 천천히 보고 생각하며 내면의 기둥을 세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말하는 것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중요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아무 생각도 안 하는 시간이 정말로 중요한 순간이다.”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에서 위안을 얻은 문장이다. 사실 그간 마음이 어려웠다. ‘이 곳에 온 의미가 없어진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지금의 시간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고 나니 지금이 값지게 느껴졌다. 


또 다른 책은 나무와 친해지고 싶어 선택한 페터 볼레벤의 <나무수업>이다. 숲 전문가인 저자는 나무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 그저 자리만 지키고 서있는 줄 알았던 나무가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무의 천천히 가는 시간 속에서 인간이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몇 백년의 긴 세월을 살아내는 나무의 속도는 인간에겐 변화가 없는 듯 보인다. 그래서 인간은 숲이 지향하는 미래와 전체를 보지 못하고 어리석게 행동한다. 


저자는 나무의 상품가치라는 좁은 테두리 안에 갇혀 있던 자신을 반성하며 천천히, 그리고 섬세하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나무를 바라보며 글을 썼다.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숲의 신비로움을 알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성장과 방어, 이 두 가지를 세심하게 조율하던 균형이 깨지면 나무는 병든다는 내용이었다. 


빛이 더 많이 들어오면 광합성을 더 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치지만, 그것에 빠져 균형을 망각하면 삐끗하게 된다는 것. 겉보기엔 건강미 넘쳐 보이는 나무라도, 줄기는 서서히 파 먹힌다는 것이었다.


나무를 통해 삶의 속도가 빨라지는 만큼 감각이 무뎌질 수 있고, 욕심이 커지는 만큼 균형을 잃을 수도 있음을 배운다. 


자연은 사람, 도시, 그리고 문화를 만든다고 한다. 슬로우 라이프와 함께하는 소박한 삶을 추구하는 오레곤은 천천히 성장하는 나무를 닮았다. 현재를 충만히 누리는 이곳의 문화를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할 수 없어 아쉽지만, 그런 문화를 만든 자연은 더 진하게 만나고 갈 것 같다. 


눈부신 대낮의 햇살이 깊숙이 스며든다. 나무를 닮은 삶과 마주하는 시간. 빠른 속도로는 경험 할 수 없는 삶에 베인 진실과 마주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이다정 경기 신능중 교사
이다정 경기 신능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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