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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뉴스

[서민수 경찰관의 요즘 자녀學] 공부 잘하던 아이가 코로나 때문에 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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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적으로 코로나 사태만큼 ‘사회변동’의 역할을 가장 충실하게 한 변인(變因)도 없을 것 같습니다. 바이러스 하나 때문에 전 세계가 이토록 조종된 적이 있었나 싶고,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우리가 지향하는 미래의 가치가 과연 ‘기술혁신’에만 머물러서야 되는지를 묻게 됩니다. 덕분에 코로나 사태의 경험으로 관심도 없었던 지구의 온도를 걱정하고, 나아가 해수면의 상승과 플라스틱 제조에 대한 우려를 공감하게 된 것 또한 어찌 보면 코로나의 보이지 않는 힘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코로나 사태는 ‘코로나 세대’를 낳았습니다. 결국, 코로나 사태는 기존 부모세대에게는 ‘상실’과 ‘전환’의 시대를 열었지만, 자녀세대에게는 그들만이 가진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서막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부모세대에서 보자면 아이들이 ‘학교’를 잃었지만, 자녀세대에서 보자면 ‘디지털 학교’의 등장을 의미합니다. ‘선생님을 잃었지만 자녀세대에게는 ‘디지털 선생님’을 얻었고, 더불어 ‘부모’라는 보조교사까지 얻은 셈이기도 하죠. 더구나 아이들은 이제 디지털로 변해버린 이 모든 것을 ‘텍스트’와 ‘이미지’로 마주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 학기가 되었지만 우리 반 친구를 아이디와 닉네임으로 기억하는 것에 그리 불편해하지 않는 듯합니다.

이러한 변화에 무엇보다 당황한 당사자는 부모인 것 같습니다. 사라진 학교와 선생님 역할을 부모가 대신해야 하는 생각지도 못한 중책을 맡은 덕분이죠. 물론 ‘녹색어머니회’처럼 원한 것도 아니고 자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부모라는 ‘애매한’ 이유로 떠안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우려했던 부작용은 생각보다 일찍 드러났고, 여태까지 부담은 부모가 떠안고 있죠. 그래서 이곳저곳에서 부모들의 한숨이 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우연히 7월에만 세 명의 어머니로부터 같은 고민 상담을 받았습니다. 사는 지역이 다르고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세 명의 어머니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멀쩡히 공부 잘하던 아이가 코로나 기간 동안 너무 달라졌어요.”라며 제게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아이들은 모두 중학교 2학년 남자아이였고, 학교에서 공부도 꽤 잘하는 모범생이었습니다. 또 엄격한 집안의 아이들이라는 공통점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제 귀를 의심했던 건, 아이들 모두 코로나 이전에는 스마트폰이 없었다가 온라인 수업이 시작되면서 스마트폰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는 스마트폰이 아이 손에 들어가고부터 아이의 말수가 줄었고, 자기 방에서 나오는 시간도 줄었으며, 학교에 가야 하는 기간에도 학교 가기를 거부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아이는 잔꾀를 부려 열이 난다고 학교에 허위사실을 통보했다가 코로나 검진을 받은 일도 있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코로나로 인한 가정학습 기간이 길어지면서 최근에는 세 아이 모두 자퇴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고, 관심도 없던 분야에 집착하는 모습까지 보인다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고민을 접한 후 즉답을 드리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끊고 저는 고민에 빠졌고, 무엇보다 어머니의 말대로 ‘이번 사안이 단순히 스마트폰의 역기능일까? 아니면 아이 세대가 가진 새로운 변화의 등장일까?’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해 책에서 읽었던 ‘변화’에 대한 흥미로운 글귀를 떠올렸습니다.

소크라테스 시대 이전의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는 수수께끼 같은 격언들을 많이 남긴 고대 학자로 유명합니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 어떤 것도 멈춰 있지 않는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남긴 이 문구는 훗날 플라톤의 『크라튈로스』라는 대화편 책에 인용되기도 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은 변하고, 이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또 다른 격언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강물에 발을 다시 담그는 순간 새로운 세포 작용으로 다른 사람이 되기 때문이죠.    

하루 동안 철학과 사회학적인 접근 방식으로 고민한 후 저는 세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무엇보다 아이가 코로나 때문에 달라졌다는 어머니의 이야기와는 달리 저는 아이의 당연한 ‘변화’라는 사실을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꼭 스마트폰이 아니더라도 아이는 강물에 발을 여러 번 담근 셈이고 앞으로도 계속 발은 담글 거라고 말이죠.

부모 입장에서 아이의 전과 후를 따져보면 스마트폰이 ‘중요한 변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아이가 코로나 사회의 가정환경과 사회변동을 양방향으로 비교하고 분석할 수밖에 없는 발달과정에 서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바꿔 말해, 아이가 사는 시대의 배경과 이미 발달한 아이 수준을 대비하지 않으면 문제 해결이 힘들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로 이 문제를 어머니 혼자 감당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아버지의 권위가 높은 가정일수록 부모의 ‘큰소리’는 절대 나와서는 안 될 행동입니다. 이 말을 하고도 저는 미덥지 못해 어머니에게 아버지와 대화를 하고 싶다고 했지만 아쉽게도 한 분 외 두 분과는 통화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통화를 한 아버지는 아이의 변화에 따른 아버지의 변화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힘겹게 공감해주셨습니다.

두 번째는 코로나 시대가 요구하는 ‘부모의 역할’이 잘 작동하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얼떨결에 부모가 교사의 역할까지 해야 하니 느슨하게 볼 문제는 아니지요. 서운할 수 있겠지만, 온라인 수업 핑계 말고 사실은 부모가 편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준 건 아닌지, 또 부모는 달라진 게 없고 여전히 코로나 이전과 같은 패턴으로 아이를 대해 온 것은 아닌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의도치 않은 ‘홈스쿨링’ 때문에 부모와 아이 사이가 힘들어지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는 건 분명 같은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자녀와의 만만치 않은 ‘대화’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대화를 시도하느냐입니다. 특히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선포한 아이와의 대화라면 그 어떤 대화보다 속마음을 알아가는 과정이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감정적인 대처나 기존 방식을 앞세우는 대화는 문제 해결에 결코 도움이 안 되겠지요. 저의 마지막 의견에서 한 어머니가 “어떻게 하면 아이의 스마트폰을 볼 수 있을까요?”라며 돌직구를 날려주셨습니다. 도대체 스마트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우리 아이가 이렇게 달라졌는지를 의심하는 것 또한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조심스러운 문제입니다. 만일 부모가 아이의 스마트폰을 보고 싶다면 부모 또한 자녀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줄 수 있는 공평한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도 수긍하며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겠지요.

눈치채셨겠지만 아이에게 이미 ‘부모의 권위’는 ‘잘못된 행동방식’이라는 걸 어디선가 학습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더구나 모범생 전력이 있다면 지금까지 읽은 책들이 자신의 확신에 도움을 주었을 테고요. 또 부모의 말보다 ‘위키백과’나 특정 ‘커뮤니티’의 게시물을 더 신뢰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아이의 스마트폰을 보고 싶다면 아이의 수준을 고려한 공평한 절차가 선행되어야 하고 또, 지금 논의되는 사안이 우리 가족과 아이의 삶에서 중요한 지점이 된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도록 언어와 비언어를 모두 동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면서 ‘코로나 셔틀’이라는 말도 생겼습니다. 공부에 흥미가 없던 아이가 갑자기 밤늦도록 열심히 온라인 수업을 듣는 모습을 부모가 보고 반가운 마음에 학교 선생님에게 확인했더니 힘센 친구들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온라인 수업과 숙제를 대신 해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부모는 부모로서의 역할에 변화를 주지 못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코로나 사태만큼 우리의 일상을 지나치게 간섭하고 조정하는 시대가 있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하면 부모는 이전의 시대를 비교하며 고개를 끄덕이지만 정작 아이에게는 이런 질문 자체가 의미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비교할 시대도 없을뿐더러 지금의 시대가 그들의 시대라고 당연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변화의 주체는 부모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따끔거리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을 양해해주세요. 우리는 코로나 전과 후를 비교해서 얼마나 많은 변화를 주었을까요? 부모가 알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디지털로 이동한 마당에 우리는 아직도 코로나 이전의 부모 역할을 고수하고 있는 건 아닌지 또는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코로나 이전의 모습과 성과를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백하면, 이 질문은 제가 아닌 아이들이 제게 부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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