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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신분에 따라 사랑을 구분했던 클림트

명화 속에 숨은 사랑 이야기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에 빠지는 순간부터 연인의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어지고 모든 시간을 연인과 함께하고 싶어 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두 사람이 매 순간 같이하고 싶어서다. 그러므로 연인이 아름답고 고귀하다고 해서 정신적으로만 사랑하기는 힘들다. 연인들 간의 스킨십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독신으로 살았지만, 정신적으로 사랑했던 여인과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눴던 여인들을 철저하게 구분했다. 클림트가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을 구분했던 기준은 출신 성분이었다. 그가 정신적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귀족 계급 출신이었으며, 그가 육체적으로 사랑했던 여인들은 모델들이었다.


클림트가 평생토록 정신적으로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 에밀리 플뢰게(Emilie Floge)다. 클림트가 임종 순간에도 찾을 정도로 그녀와의 관계는 특별했다.


에밀리는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의 아내 헬레네의 동생이었다. 두 사람은 클림트가 29세, 에밀리가 17세 때 만났지만, 처음부터 연인 관계는 아니었다. 클림트가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 후 어린 조카의 후견인이되면서부터 둘은 가까워졌다.


에밀리는 빈에서 의상실 공방을 운영하면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워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았던 독립적인 여성이었고, 클림트는 보헤미아의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지독한 가난과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내 돈에 대한 집착이 심했던 것이 두 사람이 가까워지게 된 계기가 됐다.


클림트가 에밀리의 초상화를 그린 대표적인 작품은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이다.

서 있는 에밀리는 정교하게 장식된 금색, 검은색, 은색이 모자이크처럼 보이는 푸른색 의상을 입고 있다. 장식은 유일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되며, 얼굴과 손은 추상적인 형태의 배경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전통적인 초상화 표현 방식에서 벗어난 이 초상화에서 클림트는 색채와 형태로 모델의 개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클림트 특유의 복잡한 장식양식으로 향하는 중요한 변화를 보여주는 초상화다. 의뢰받지 않은 작품이었기 때문에 클림트는 장식적인 요소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에밀리가 입고 있는 옷은 당시 유행하던 스타일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 의상실을 운영하는 그녀는 초상화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클림트는 그녀에게 다른 초상화를 그려준다고 약속하지만 1902년 이후에 에밀리의 초상화를 그리지 않아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클림트는 죽을 때까지 27년 동안 에밀리와 함께했다. 두 사람은 같이 생활은 하지 않았지만, 여름휴가나 집안 행사, 식사 모임 등 평생 함께하는 시간을 보냈다. 클림트는 죽은 후 유산을 에밀리와 그녀의 여동생에게 상속한다.

유산을 상속받은 에밀리는 그의 화실에 남아 있던 편지와 모델들을 그린 그림들을 일부 불태워 버렸다. 에로티즘을 표현한 그림들이 클림트와 자신의 명성에 흠을 낸다고 생각해서다.


클림트가 에밀리 플뢰게와는 정신적인 사랑을 하면서 평생을 함께했다면, 또 다른 귀족 출신 여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Adele Bloch-Bauer)와는 짧은 사랑을 나눴다.

기업가 페르디난트 블로흐가 빈 은행가의 실력자의 딸이었던 아내 아델레의 초상화를 클림트에게 의뢰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클림트가 아델레의 초상화를 그린 작품이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이다.


금박으로 된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이 두 손을 잡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그녀와 남편을 위해 클림트는 새로운 표현방식을 구상한다. 이제까지 그가 초상화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금, 은박을 화면에 입혀 정교하게 장식한 것이다.



이 초상화를 완성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복잡한 장식을 처리하기 위해 클림트가 정교하고 독특한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복잡한 장식과 호화로운 금, 은박의 사용은 아델레 블로흐-바우어를 신비스럽게 만들었다. 그녀는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사는 여신 같은 존재로 보인다.


부와 관능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이 초상화는 그녀가 원한 모습이 아니라 의뢰인인 남편이 남에게 보여주기 원하는 모습으로 표현됐다. 고가의 모피와 보석, 의상을 걸치고 있는 초상화는 아델레의 저택에 가장 눈에 띄는 장소에 걸려 남편의 예술적 안목과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게 했다. 남편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그녀는 화려한 목걸이와 모피를 착용하고 모델로 섰다.


의뢰인이었던 남편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이 초상화는 전통적인 초상화 기법에서 벗어나 있지만, 클림트의 초상화 중에서 가장 화려하다. 모델의 얼굴과 손 그리고 어깨 부분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화면의 나머지 공간을 무척 장식적인 무늬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비잔틴 황금 모자이크를 연상시키는 스타일과 장신구는 그녀의 사회적 지위를 알려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상화는 살아 있는 여성이 아니라 여신의 신비스러운 이미지에 가깝게 표현됐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의 유명한 작품 <유디트 I>에서 드러난다. 유디트의 모델이 한 목걸이가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와 같기 때문이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초상화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클림트의 초상화 대부분은 빈 대학 회화 논쟁 이후에 제작됐다. 그가 대학에서 의뢰한 작품에 여인의 누드를 그려 논쟁이 촉발됐고 결국 빈 대학의 의뢰가 그가 마지막으로 받았던 공공기관의 의뢰였다. 반면 빈 상류층들이 초상화를 의뢰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는 유럽에서 초상화가 인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초상화를 다른 작업과 동일시하게 중요하게 여겼으며, 의뢰한 고객의 눈에 맞추면서도 자신만의 표현 방식으로 제작했다.


에밀리와 아델레의 초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클림트는 초상화를 거의 실제 인물의 크기로 그렸으며 상류층 여성의 우아함을 놓치지 않고 표현했다. 모델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배경을 장식적인 요소로 극대화시켜 구성했는데, 이는 일반인과 다른 사교계 여성들의 배타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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