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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초등

[NOW] “금쪽같은 내 조카인데…” 자식 일처럼 나서는 ‘삼촌·이모’들

# 직장인 이지연(가명·경기 수원)씨는 이달 초 초등학교 교실 환경판 꾸미기에 열을 올렸다. 2학기 들어 환경부장을 맡은 조카를 위해 학급 환경미화용품 만들기에 동참한 것. 이씨는 “디자인을 전공한 적성을 살려 조카네 교실에 폼아트로 '수업 시간표'를 만들어줬다”며 “육아하랴 살림하랴 바쁜 언니를 대신해 이모가 직접 나서 조카의 기를 팍팍 살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바야흐로 ‘가족 공동 양육시대’다. 최근 출산율 저하로 외동 자녀 가구가 증가하면서, 아이에 대한 관심이 부모뿐 아니라 조부모·친척들에게까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조카를 제 자식처럼 생각하는 삼촌∙고모∙이모들이 늘고 있다. 기존에 선물을 사주는 식의 물질적인 관심을 넘어, 유치원·학교 행사나 교육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조카 양육’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사례가 많아진 것. 네 살배기 조카를 둔 이모 최수영(가명·서울 영등포구)씨는 최근 조카가 다닐 만한 영어 유치원을 알아보고 있다. 최씨는 “지난 어린이날에 조카에게 영어 동화책 전집을 선물했는데 제법 흥미를 느끼는 것 같다”며 “현재 일반 어린이집에 다니는데, 내년부턴 ‘영어 유치원에 다니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어 언니·형부와 함께 집에서 가깝고 조카가 좋아할 만한 프로그램을 갖춘 곳으로 찾아보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조카의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학교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다섯 살 난 조카를 둔 김유정(가명·경기 수원)씨는 "올해 초 직장에 다니는 여동생 대신 조카의 국공립 유치원 추첨을 위해 수원에서 인천까지 갔다"고 말했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김하영(가명·서울 서초구)씨도 중학생 조카를 위해 지난 1학기 기말고사 학부모 시험 감독으로 참여했다. 맞벌이하는 오빠네 부부 대신 상대적으로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김씨가 직접 나선 것. “회사에 일이 생겨 시험 감독을 못할 것 같다며 발을 동동 구르는 새언니를 보곤 제가 먼저 하겠다고 나섰어요. 45분씩 2교시가량 서서 있으려니 다리도 아프고 힘들었지만, 조카를 위한 일이니 기쁜 마음으로 임했죠.”

이처럼 조카 양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다 보니, 부모 대신 교육기관과 교사 등에 항의하는 경우도 생겼다. 유치원생 조카를 둔 강지민(가명·대전 유성구)씨는 며칠 전 아이가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떠들었다는 이유로 점심을 늦게 줬다는 말에 곧장 유치원에 전화를 걸었다. 강씨는 “아이가 식사가 늦어져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먹느라 옷에 국물을 흘렸는데, 이에 더 꾸중했다는 말에 화가 났다”며 “여동생은 항의 전화하면 아이한테 안 좋은 영향이 갈까 싶어 그냥 넘기자고 했지만, 꼭 짚고 가야 재발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 직접 전화로 ‘주의해달라’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최근엔 사립유치원 집단휴업 번복 사태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등 어린 조카와 관련된 국가 정책에도 관심을 갖는 추세다. 사립유치원이 집단휴업과 철회를 번복했던 지난 주말, 각종 온라인 육아맘 커뮤니티에서는 “어른들 밥그릇 싸움에 애꿎은 우리 조카만 피해를 보고 있다”며 “보육대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사립유치원의 행태를 꼬집는 게시글이 속속 올라오기도 했다.  

이 같은 ‘조카 사랑’은 간혹 지나쳐 사회적 문제로도 발생한다. 최근 여고생 조카에 대한 상담 내용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몸에 칼을 차고 학교에 찾아가 교사 등을 협박한 40대 이모가 실형을 선고받았다. 지난달 23일 울산지법 형사4단독은 특수공무집행방해와 모욕 등의 혐의로 기속된 A(46·여)씨에게 징역 10개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고 밝혔다. A씨는 지난해 8월 울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중학교 시절 왕따를 당했다는 등 조카의 개인적인 상담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렸다며 상담교사인 B(40·여)씨에게 “너 때문에 조카와 가족이 다 죽게 생겼다”고 소리치는 등 행패를 부린 혐의로 기소됐다. A씨는 또 같은 달 교장실에서 식칼 등 12자루를 허리에 매단 채 ‘상담교사 때문에 조카가 죽게 생겼다’는 피켓을 들고 시위했으며, B씨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위협한 혐의도 받고 있다. 그는 ‘남의 집 귀한 자식을 죽음의 지경으로 몰아넣고 너는 오리발만 내밀고’ 등 공포심이나 불안감을 유발하는 문자메시지도 십여 차례 B씨에게 보내기도 했다. 재판부는 “B씨가 상담 내용을 다른 학생들에게 유출하는 등 상담교사로서 부적절하게 처신했다”면서도 “그러나 교육 현장인 학교에서 통상적인 시위나 소란의 정도를 넘어서는 행위까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로 ‘대리만족’을 꼽았다. 인간은 대개 2세에 대한 보편적 욕구가 있는데, 결혼에 대한 부담과 책임감 없이도 아이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방안을 찾다 보니 자연스레 ‘조카 양육’으로 이어졌다는 것. 고강섭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맞벌이 부부가 급증하고 보육대란이 겹치면서 어린 자녀를 친가나 외가에 맡기는 경우가 잦아지자, 자신의 집 안에 들어온 어린 조카를 친자식처럼 챙기는 경우도 증가했다”며 “또한 만혼(晩婚)이나 비혼(非婚),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자녀를 갖기 부담스러워하는 현 사회적 배경도 조카에게 애정을 쏟게 된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 같은 ‘조카 사랑’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나아가 고 교수는 앞으론 혈육뿐 아니라 지인의 자녀를 대상으로 애정을 쏟는 경우도 생길 것으로 내다봤다. “1인 가구 증가 등 가족의 형태가 변화하면서 친족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로까지 인식의 범주가 확대될 수 있습니다. 절친한 선·후배나 친구의 아이에게도 관심을 쏟는다는 것이죠. 지금처럼 출산율 저하와 싱글족 증가가 계속된다면,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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