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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들의 진로 탐험] 미국 독립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

조지 워싱턴이 신생 미국에 남긴 것들



단 하나뿐인 미국 건국의 아버지
7월 4일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다. 강한 국가가 약한 민족을 강제로 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하고 착취하는 식민주의 시대 처음으로 그 지배국가와 맞서 싸워 스스로의 자유와 자존을 쟁취한 1779년 미국의 독립(본래의 의미에서는 독립선언)은 인류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미국이 독립을 이루는 데에는 여러 유능한 지도자들이 많은 공헌을 했다. 피뢰침을 발명하고 서머타임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한 것으로도 유명한 과학자이자 사상가였던 벤자민 프랭클린,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토마스 제퍼슨, 미국의 화폐와 은행 등 경제제도를 구축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알렉산더 해밀턴, 처음 워싱턴과 대통령 경선에서 맞붙고 부통령이 된 정치가 존 애덤스, 주지사를 두 차례 역임하고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명연설을 남긴 패트릭 헨리…. 어떻게 보면 미국의 독립전쟁 당시 아메리카는 어떻게 이리 여러 분야에 걸쳐 뛰어난 인재들이 여럿 있었는지 감탄하게도 된다.

그러나 독립 당시 이런 인재들이 많이 있었기에 미국은 어떻게 되어서든 결국 독립을 이룩해낼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로지 이 한 사람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미국은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지닌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조지 워싱턴이다. 바로 그런 평가와 명성 때문에 그는 여러 명의 미국 건국영웅('Founding Fathers') 가운데 단 하나뿐인 미국 건국의 아버지('Father of His Country')로 존경받는 존재로 남게 된다.




워싱턴이 대영제국 해군에 입대했다면?
워싱턴은 미국이 독립하기 47년 전인 1732년 대영제국의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태어났다. 영국에서 건너온 상류층 출신의 담배 재배농인 어거스틴 워싱턴과 그의 두 번째 부인 매리 볼 워싱턴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1656년 영국으로부터 건너와 버지니아에서 땅을 사들이고 노예들을 사들여 농사를 지었다. 아버지 어거스틴은 담배의 원료인 연초를 재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철공소도 운영했다.

워싱턴이 어렸을 때 그의 집안은 버지니아에서 아주 최상의 상류층은 아니었지만, 생활에는 부족함이 별로 없는 제법 부유한 편이었다. 조지 워싱턴 위로는 아버지 어거스틴이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배다른 형인 로렌스와 어거스틴이 있었고, 같은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동생들도 4명이 있었다.

조지가 11세 때 아버지 어거스틴이 갑작스런 병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배다른 형으로 집안의 장남인 로렌스가 사실상 가장으로서 집안을 이끌었다.

로렌스는 아버지처럼 영국의 사립학교를 나왔다. 하지만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조지는 영국 유학을 가는 대신 집안에 가정교사를 들여 문법과 외국어 그리고 수학을 배웠다. 당시 유복한 집안 자녀들은 보통 보스턴 같은 대도시나 아니면 영국으로 가 사립학교를 다니거나 아니면 집에 가정교사를 초빙해 교육을 받곤 했다.

10대 중반까지 조지는 또 다른 이유로 영국으로 갈 수도 있었다. 아버지가 조지를 15살이 되면 대영제국 해군의 소년사관으로 입대시킨다고 약정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대영제국 해군 입대는 기회는 어머니가 반대해 결국 취소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지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계셨더라면 아마도 '조지 워싱턴의 신화'는 싹조차 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영국의 사립학교를 졸업하고, 대영제국의 해군에 입대하게 됐다면 그가 과연 미국의 독립전쟁을 이끄는 존재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미국 독립전쟁 당시나 그 뒤로도 대영제국에 동조하던 왕당파격인 '로열리스트'로-에디슨의 아버지와도 같이- 남았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조지가 대영제국의 해군장교로 성장해 미국 독립전쟁 당시 보스턴으로 출전하는 대영제국 해군의 함장으로서 미국의 독립군에게 함포사격을 명령하게 됐을 수도 있다.)




형이 남긴 유산
형 로렌스는 조지와는 어머니가 달랐지만, 청소년 시기와 청년 시기 조지가 제대로 성장하고 제대로 세상을 경험하도록 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로렌스가 버지니아의 대가문 페어팩스가문과 결혼해 연결된 인맥이 나중에 조지 워싱턴의 성장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로렌스의 장인 윌리엄 페어팩스는 버지니아에서 가장 넓은 땅을 소유한 토마스 페어팩스경의 사촌이었다. 특히 조지는 그런 로렌스가 폐결핵을 앓고 있는데도 그를 간병하기 위해 같이 여러 번 장거리 여행에 동행하는 등 형을 나름대로 깍듯이 모셨다.

조지가 20세 때 로렌스는 폐결핵 요양에 좋다는 카리브해의 바베이도스로 가면서 조지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조지는 기꺼이 나섰다. 거기서 조지는 천연두를 앓게 된다. 이 때문에 평생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남게 됐다. 형 로렌스의 병도 별 차도를 보지 못하고 더 나빠졌다. 이듬해 로렌스는 결국 버지니아 마운트 버넌으로 돌아와 죽고 만다.

로렌스는 그러나 자신에게 성실했던 배다른 동생 조지에게 많은 토지와 함께 자신이 지닌 인맥의 가능성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특히 그가 남긴 유산 가운데에는 바로 미국 독립에 기여할 크나큰 중요성을 지닌 '군인으로의 길'을 결정하게 되는 사건도 들어있었다. 로렌스는 죽기 전까지 버지니아 식민지 방위군의 군정장군으로 일했었다. 그가 죽자 버지니아 방위군은 4개 지역군으로 분할되면서 각각의 군정장교를 두게 되었다.

조지가 그 가운데 한 지역군의 군정장교로 임명됐다. 계급은 소령이었다. 1753년의 일이었다. 조지가 비록 아직은 대영제국 식민지의 보조군대이지만, 군의 고위 장교로 단박에 임명된 데에는 무엇보다 로렌스가 대영제국 버지니아 식민지의 유력한 상류 귀족가문의 사위였다는 사실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로렌스의 장인 윌리엄 페어팩스의 사촌형 이름에도 대영제국의 귀족임을 알리는 '로드'가 들어가 있다. 물론 수학을 좋아하던 조지가 17세부터 배워오고 직업으로 삼았던 측량기사의 경험도 크게 도움을 줬다. 대영제국도 측량기사로서 조지가 쌓아왔을 경험과 현지 지리에 대한 탁월한 이해도가 장교로서의 역할 수행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겠지만, 최종적인 수혜자는 '제국'이 아닌 '합중국'이 된다.

조지는 측량기사 일을 배운 뒤 처음 실제측량에 나가 이틀 만에 400에이커의 토지에 대한 측량작업을 완료해냈다. 그 뒤 카운티의 공식 측량기사로서 버지니아 식민지의 서부 곳곳을 누빈다. 이 모든 답사와 측량작업이 나중에 미국 독립전쟁에서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독자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대영제국군으로 영국군의 모든 것을 습득하다
탁월한 측량기사의 경험과 능력을 갖춘 채 장교의 길에 들어선 조지는 곧 소중한 실전경험까지 풍부하게 쌓게 된다. 1753년 발발한 '프랑스-인디언 전쟁'에 대영제국군 진영에 소속한 채 참전한 것이다. 전쟁 직전 오늘날의 미국에 해당하는 아메리카 지역은 아직 영국이 완전히 지배하는 형태가 아니고 버지니아 등지에 프랑스의 식민지도 나란히 존재하는 병립의 형태였다. 서남쪽인 텍사스, 뉴멕시코 지역은 아직 스페인이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다. '프랑스-인디언 전쟁'은 버지니아의 오하이오강 계곡 지역으로 프랑스군이 치고 들어오면서 벌어졌다.

버지니아 식민지 방위군의 소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은 영국 국왕의 대사 자격으로 오늘날 펜실베이니아의 어리 지역의 프랑스-인디언 연합군에게 철수를 요구하기 위해 파견됐다. 이때 그는 100명의 군인을 지휘하면서 영국 쪽의 밍고족 인디언과 합세해 프랑스군을 기습해, 지휘관을 비롯해 많은 프랑스군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이 전투의 승리로 그는 꽤 유명해졌다. 나중에 그는 복수를 다짐한 프랑스군에게 거꾸로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유화정책에 따라 풀려나 버지니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영국군 수뇌부가 그에게 패배와 포로가 된 책임을 물어 소령에서 대위로 강등시키려 하자,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하고 군정장교직을 사임했다.


영국-프랑스 사이의 전쟁은 1755년 프랑스가 본국에서 대규모 병력을 증파하고 대영제국도 맞서서 파병하면서 결국 1556년 본격전으로 발전했다. 워싱턴은 다시 버지니아 방위군으로 차출돼 대영제국군의 에드워드 브래드덕 장군의 식민지 보좌관으로 근무했다.

그해 워싱턴은 버지니아 식민지 부지사인 딘위디로부터 ‘대영제국 국왕폐하의 식민지 버지니아 방위를 보강하기 위해 현재 소집된 전 방위군의 사령관 겸 버지니아연대 대령’이라는 긴 직책을 받는다.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소집된 방위군의 총사령관이 된 것이다. 대영제국은 그러나 그에게 대영제국군 장교를 나타내는 견장과 계급장은 허용하지 않았다.

이 직책은 워싱턴과 미국의 독립전쟁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먼저 당시 버지니아 식민지 방위군은 식민지 지역에서 처음으로 완전상비군 체제로 운영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전까지 각 식민지 주의 방위군은 하나같이 파트타임으로 운용됐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예비군을 연상하면 되겠다. 그러나 버지니아군은 완전한 군대처럼 움직이고 훈련됐다. 또 하나는 조지 워싱턴이 사령관으로서 독자적으로 공격과 방어에 대해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식민지 아메리카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상비군의 사령관으로서, 독자적인 작전권을 행사하고 경험할 수 있었다.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대영제국군에 편입돼 근무하면서 영국군의 전쟁방식, 전략과 전술, 훈련방식, 군수물자 조달, 병력동원 등 영국군의 거의 모든 것을 경험하고 깊이 배울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대영제국군 안에서 차별받으면서 워싱턴은 제국군의 강점과 약점을 충분히 포착하는 한편, 미래의 더 크고 중대한 전쟁-미국의 독립전쟁-을 지휘할 지휘관으로서의 모든 것을 축적하고 단련시켜나갔던 것이다.




인간의 자유와 창발력에 대한 신념




워싱턴이 미국 독립전쟁에서 발휘한 두 가지 능력 가운데 하나인 '군대의 일'을 배우게 된 계기는 거슬러 올라가면 배다른 형 로렌스와의 우애와 만나게 된다. 또 다른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독립에 대한 결단이랄까, 독립의 사상은 증조할아버지로터 시작되는 사업능력, 창업능력과 연관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증조할아버지는 미국 이민을 결행한 뒤 새로운 농지와 아메리카의 노예농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아버지는 카운티의 판사 출신인데도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져온 농업을 승계하고 나아가 철공소까지 겸업했다. 다채로운 진로 모색에 주저하지 않았다.

조지 워싱턴 자신도 프랑스-인디언 전쟁 뒤 퇴역해서는 농지를 늘리는 일, 토지를 비옥하게 가꾸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다가 아버지처럼 담배 재배 하나에만 의지해선 위험할 수 있다고 판단해 밀 재배로 돌아선다. 밀은 식량이나 술의 원료로 다양하게 쓰이고 보관도 장기간 할 수 있었다.

나중에 그는 제분소, 어업, 종마, 양돈, 방직업 등으로도 영역을 넓힌다. 이렇게 창발적으로 사업을 확장해가는 도중에 영국이 식민지 지역에 대해 강력한 직접세 징수에 나서자 그는 곧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의 사업능력과 창업능력에 대한 영국의 제재가 독립 사상의 탄생으로 즉각 전화한 것이다.

그가 지닌 인간의 자유와 창발력에 대한 신념은 나중에 결국 이런 유언을 남기는 것으로 이어진다.
"내 아내가 죽으면 우리 집의 노예 300명은 모두 해방시켜라."
1799년, 아직 링컨의 노예해방령이 나오기 64년 전의 일이었다. 평생을 자신과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워온 그에게 역시 노예제도는 부정해야만 할 명제였던 것이다.

창발(創發) | 남이 모르거나 하지 아니한 것을 처음으로 또는 새롭게 밝혀내거나 이루는 일.




조지 워싱턴이 신생 미국에 남긴 것들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을 맡았던 1789년 당시 미국은 아직 큰 나라가 아니었다. 독립국가에 들어온 주는 아직 11개에 지나지 않았고, 나라 전체의 인구는 500만 명 정도밖에 안 됐다(당시 중국은 이미 인구 3억 명을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 앞에는 어떤 나라도 모범이 될 나라가 아직 없었다(프랑스는 아직 대혁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 민주주의는 이제 미국으로부터 시작돼야 했다. "내 다음에 올 대통령들이 어떻게 하도록 해야 할까?" 그는 그 문제를 가장 고민했다.

그 속에서 그는 오늘날까지 미국은 물론 많은 민주국가에서 그대로 따르는 의미 있는 제도와 관행을 속속 만들어냈다.


① 헌법에는 제한을 두지 않았지만, 대통령직은 2차례 정도 하는 게 맞다.

그는 그렇게 했고, 이 관례는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특수상황 때문에 프랭클린 루즈벨트에 의해 지켜지지 않았다. 그 뒤 1950년대 미국은 대통령 2회 연임 제한으로 아예 헌법을 고쳤다.


② 중앙은행을 둔다.

이전까지 유럽 어떤 국가도 중앙은행을 두지 않고 복수의 여러 은행을 운영했다.


③ 대법원장을 임명한다.


④ 대통령이 정치를 시작하면서 각 장관으로 이뤄진 각료진을 조각해 운영한다.


⑤ 영국과 휴전협정을 체결한 뒤 막강한 권력을 쥔 독립군 총사령관에서 미련 없이 사퇴했다.

어떤 역사가는 이것이 워싱턴의 가장 큰 공헌일지도 모른다고 평가한다. 실제 나폴레옹은 군대에서의 성공을 자신의 황제 취임으로 이어나가, 결과적으로 프랑스혁명의 대의에서 멀어졌다.


민주주의는 한 개인 또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역정 속에서 이렇게 한 발씩 전진해왔다.


*에듀진 기사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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