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 NIE

자유의 전진을 노래하다! 위대한 음악의 성인, 베토벤

들리지 않는 '운명'을 '환희의 송가'로 승화시키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자유를 향한 몸짓에 날개를 달다 
1824년, 강렬한 자유의 정신으로 충만한 독일의 천재음악가가 다시 오선지 앞에 앉았다. 자신의 생애 9번째 교향곡의 마지막 제4악장 마무리를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미 유럽은 여러 차례 크고 작은 곡절을 겪은 채 근 30년 전 독일 낭만주의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가 ‘자유찬가’(나중에 ‘환희의 송가’로 이름을 바꿨다.)에서 찬미한 새로운 빛을 향해 조금씩 전진해가고 있었다. 

보다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는 실러의 시는 이제 독일 전역의 젊은 세대들이 프랑스 혁명의 노래 '라 마르세예즈'의 멜로디를 빌려 열창하는 새로운 시대정신의 상징이 됐다. 유럽은 종래 왕과 귀족 중심의 억압적인 낡은 구체제로부터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인류는 이제 보다 자유롭고 보다 평등한 새로운 체제를 함께 열어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었다. 

새 시대를 향한 도전에 그 누구보다 적극적이던 이 천재음악가는 바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그 자신의 가슴을 짓누르는 불편한 그 무언가 있음을 느꼈다. 바로 ‘배신’이었다. 

한때 새로운 유럽을 열어줄 인물로서 영웅처럼 반겼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새 시대를 꿈꾸던 청년들과 지식인, 예술가들의 열망을 저버린 채 스스로 가장 상징적인 구체제의 정점인 황제 자리에 올라버렸다. 자유를 향한 도전은 매우 소중하고도 값지지만, 이처럼 언제든지 후퇴하거나 배반당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향한 몸짓은 어떤 어려움이라도 딛고 신을 향해 나아가는 고결한 존재로 승화돼야 했다. 자유를 향한 인간의 도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신으로부터 내려오는 신성한 그 무엇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베토벤은 실러의 단순하고 낙관적인 정열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문득 그는 하나의 착상이 떠올랐다. 그는 펜으로 거침없이 긁어내려갔다. 



"오, 친구여! 정녕 이 소리는 아니라네. 차라리 더 행복하고 더 기쁜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세." 

마치 한 선지자가 거대한 민족의 운명을 예고하는 위대한 서사시의 시작을 알리는 듯, 웅장한 합창의 코러스가 울려 퍼지기 직전 바리톤 가수는 그윽하면서도 중후한 음정으로 세상의 잘못을 향해, 한 영웅의 배신을 향해 경고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 순간 베토벤은 단순한 음악가를 넘어 위대한 시인으로, 용기 있는 시대의 개척자로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누가 감히 실러의 시를 뜯어고치며 더 우렁차게 외칠 수 있단 말인가? 누가 감히 구체제의 어둠으로 되돌아가는 유럽의 보수 수구 실력자들을 향해 이토록 용감하게 반대의 뜻을 공공연하게 선포할 수 있단 말인가? 오로지 베토벤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161년 뒤 그의 이 교향곡 4악장의 합창은 유럽연합의 공식 상징가인 ‘유럽연합가’로 지정되고, 다시 그 4년 뒤에는 동유럽 공산주의 진영을 휩쓴 동유럽혁명의 상징가로 자리 잡았다. 교향곡 9번의 자필 악보 원본은 2003년 소더비경매장에서 330만 달러에 낙찰돼 팔렸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모차르트에 버금가는 천재의 탄생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1770년 12월 17일 독일 라인강 상류 본(Bonn)에서 음악가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영국에서는 이미 산업 혁명이 시작되고 있을 시기였다. 원래 베토벤의 형제자매는 일곱 명이지만 차남 루트비히와 3, 4남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죽었다. 

아버지는 베토벤을 일찍부터 모차르트처럼 천재음악가로 키우는 게 소원이었다. 그 때문에 아들 베토벤의 나이조차 2살 어리게 가장하기도 했다. 일설에서는 ‘베토벤이 이런 아버지의 욕망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매우 가혹하게 매질까지 당하면서 교육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기도 하지만 사실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오히려 베토벤은 비교적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어린 음악 영재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고, 모차르트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스스로의 음악적 천재성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버지가 술주정뱅이인데다가 어린 베토벤의 벌이에 상당히 의존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결국 베토벤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두 동생을 떠안는 사실상의 '소년가장' 비슷한 처지로 생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들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은 베토벤은 어렸을 적 모차르트와 같은 즉흥연주로 어느 정도 음악계에 이름을 알린 뒤, 한 훌륭한 멘토를 만났다. 당시 세계의 음악수도라 할 수 있는 빈의 궁정 오르가니스트인 크리스티안 고틀로 네페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이끌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네페는 베토벤에게 작곡을 가르쳐주고, 아직 13살에 지나지 않는 그를 궁정의 보조 오르가니스트로 채용했다. 그의 지도 아래 베토벤은 몇몇 초기 작품들을 작곡할 수 있었다. 드레슬러 행진곡에 의한 9개의 건반 변주곡(WoO. 63)도 그 가운데 하나다. 네페의 지도로 베토벤은 음악적으로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인 작곡을 보다 심도 있게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베토벤은 깨어있는 ‘시민 의식’의 소유자였다! 
베토벤은 당시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귀족들로부터 적지 않은 후원을 받았다. 본의 귀족 브로우닝 가문을 비롯해 브로우닝 가문에서 만난 발트슈타인 백작, 나중에 발트슈타인 백작의 소개로 만난 빈의 리히노프스키 후작, 그리고 그의 일생 후반부 가장 큰 후원자가 된 루돌프 대공 등도 모두 그를 도왔다. 

그러나 이들 귀족과 베토벤의 관계는 이전까지의 음악가들과 상당히 다르다. 이전 음악가들과 귀족 후원자와의 관계는 사실상 주종관계 비슷하다. 이와 달리 베토벤은 대등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거의 1대1의 동등한 관계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 베토벤은 이런 귀족가문의 여성들과 여러 차례 연애를 하는 등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분위기를 연출하곤 한다.

어떻게 베토벤은 귀족들과 이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2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베토벤이 네덜란드의 옛 귀족 혈통을 타고 태어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와 이름이 똑같은 그의 할아버지가 바로 네덜란드 귀족 출신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에는 네덜란드 귀족을 나타내는 '판'이라는 중간이름이 들어가 있다. 

보다 중요한 요인은 베토벤 자신이 스스로 '자유'와, 그 자유를 바탕으로 성립할 수 있는 '시민'의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귀족'이기에 대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기에 대등해야 한다는 의식이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실러의 시처럼 서로 '친구여!'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인 셈이다. 베토벤은 귀족으로부터의 후원을 계약의 형태로 정확한 기간과 금액을 명시해서 규칙적인 시점마다 받는 식으로 진행했다. 

역설적이게도 베토벤의 신념에 맞는 방향으로 세상과 사회가 발전해갈수록 그 자신은 경제적으로는 더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된다. 선의를 지닌 귀족으로서 그를 돕던 귀족들이 점차 경제적 사회적 힘을 잃어가면서 베토벤에 대한 지원도 점차 말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베토벤, 가혹한 예술가의 운명에 정면으로 맞서다
"따다다단~!"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렸다. 예술가의 숙명과도 같은 사태가 베토벤에게도 닥쳐온 것이다. 베토벤은 그러나 이 운명에 맞서 힘껏 전진해갔다. 베토벤은 비록 일반적인 보통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불행하고 불우한 삶을 산 천재로 비춰질 수도 있다. 특히 대다수 사람들이 그 어느 시대보다 돈을 숭상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실질적인 이해타산에만 빠져 들어가는 듯한 21세기 초 우리의 상황에서 보면 더더욱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베토벤의 일생은 역사에 남는 위대한 음악가이자 예술가로서 뿐만 아니라 한 시대를 여는 데 적지 않게 기여한 철학자이자 사상가로서, 나아가 평생 동안 숱하게 어려운 상황에 빠지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분투한 인간으로서 재평가할 만하다. 

음악가로서 그는 그 이전 시대까지 예술의 한 분파로서 인간과 사회에 대해 철저히 종속적으로 봉사하는 수단으로 간주되던 음악을 최고의 인간행위 가운데 하나로 승격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베토벤 이전까지 음악가들은 왕족과 귀족들의 호사와 기호를 위한 도구로 평가됐다. 

하지만 그는 귀족에 대해 대등한 인간으로서 바로 서기 위해 노력했고 실제로 상당부분 그것을 관철시켜 나갔다. 후세의 한 평론가는 그의 음악과 삶을 "타오르는 정의감에 뿌리내린 엄격한 도덕성을 그만큼 음악으로 일관시킨 예술가는 그 전에나 뒤에도 발견할 수 없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특히 그의 대표작으로 표현되는 교향곡 하나하나에 붙여진 별칭을 살펴보면 교향곡 3번 '영웅', 교향곡 4번 '낭만적', 교향곡 5번 '운명', 교향곡 6번 '전원', 교향곡 9번 '합창' 등이다. 이 별칭만 보더라도 그의 작품이 얼마나 철학적인지, 얼마나 사회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려 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나아가 그가 구체제를 뛰어넘으려는 자유의 정신과 시민사회에의 열망을 주요 작품에 잘 반영시켜 표현했다는 사실을 보면 그가 진정으로 인류 역사의 발전을 위해 기여한 사상가였다는 점을 더더욱 깨닫게 된다. 

가 처음 프랑스 혁명을 유럽에 전파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던 나폴레옹을 위해 <영웅>을 작곡했다가 나중에 그의 황제 즉위 소식을 듣고 그 악보를 찢어버렸다는 일화는 이런 성격을 잘 나타내준다. 교향곡 1번을 작곡하면서 종래의 전통과 달리 불협화음을 과감하게 채용해 아름다움이나 조화 대신 힘과 긴장으로 물들여간 점도 이런 흐름을 보여준다. 



음악의 성인으로 다시 태어나다 
베토벤은 자신의 예술과 삶에 가장 중요한 육체적 기능을 잃어버렸는데도 좌절하지 않고 노력해 이 고난을 위대한 작품으로 승화시켜 높이 평가받는다. 음악가가 청력을 잃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베토벤은 피아노 소리를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해 피아노 공명판에 막대기를 대고 입에 물어서 그 진동을 턱으로 느끼려 했다. 귓병을 영영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앓았던 32살 한창 나이의 그는 자살하려고 유서까지 썼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이 모든 것을 이겨낸다. 그는 자신의 음악적 성과가 압축된 대작들의 시리즈인 교향곡의 제1번을 난청 상태에 들어간 시기에 작곡했고, 자신의 모든 작품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받곤 하는 교향곡 제 9번 '합창'을 완전히 청력을 잃은, 완전히 귀를 먼 상태에서 완성해냈다. 

이 작품을 초연할 때 지휘를 맡은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기에 청중들의 반응이 어떤지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한 여가수가 베토벤을 객석을 향해 뒤돌아서도록 도와주었다. 그제야 베토벤은 교향곡 9번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나중에 '음악의 성인, 악성'으로 불릴 이 위대한 음악가의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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