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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오키프, 세상의 편견에 ‘꽃’으로 맞서다!

색안경을 벗고, 있는 그대로를 직시하라!



‘여류화가’는 여성인 미술인을 지칭하는 단어로 흔하게 사용된다. 그렇다면 반대로 ‘남류화가’라는 단어는 어떨까? 의미는 짐작할 수 있지만 들어본 적도 없고, 낯설게 느껴진다. 이렇게 현재까지도 여전히 관습, 습관으로 굳어져 눈치 채기도 어려울 만큼 자연스럽게 남아있는 성 평등에 관한 문제. ‘조지아 오키프’는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처럼 편파적이고 불공정한 편견 속에서 평생을 세간의 오해에 시달려야 했다. 

살아생전 자신의 작품을 인정받고 명예를 얻었지만 그녀는 이보다 그저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것에 더 목말라했다. 이런 이유로 자신에게 ‘여류화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몹시 싫어한 조지아 오키프. 그녀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따라가며 진정한 성 평등이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자. 





미국 현대미술을 이끈 ‘인간’조지아 오키프 조지아 
오키프는 '20세기 미국 근대 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화가다.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은 20세기 초 유럽 예술사조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미국에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유럽 예술사조에 물들지 않은 자신만의 화풍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해 간 조지아 오키프는 이미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20세기 미국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화가로 인정받았다. 

그녀의 작품은 언제나 논란과 화제의 중심에 서 있었다. 특히 그녀가 ‘꽃’을 그린 대표 작품에 대한 말이 많았는데, 당시 비평가들은 꽃을 확대한 이 작품들이 여성의 은밀한 부분을 은유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녀의 작품들은 성적 암시와 관능을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같은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키프는 확대한 꽃을 그리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진정한 자세로 꽃을 보지 않는다. 꽃은 너무 작아서 그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거대한 꽃을 그렸고, 사람들은 그 거대함에 놀라 찬찬히 꽃을 제대로 감상하게 된다.” 

하지만 오키프는 작품 자체보다 작품과 성(姓)을 관련지어 해석해 비난하고 희롱하는 말들에 평생을 시달려야 했다. 사실이 이런 데에는 남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회화 세계에 여성이 동등한 자격으로 진입한 것에 대해 불편해하는 시선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조지아 오키프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내 그림을 보고 그림이 아니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림이라고 한다. 이처럼 내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은 모두 다르다. 그러니 결국 내 방식대로 가는 게 최선 아닌가.” 



꽃에서 피어난 예술가 
시골농장에서 태어나 평범한 미술교사로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는 1887년 11월 15일 미국 위스콘신 주 선 프레리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부모님 슬하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자연과 친숙했다. 그래서 그녀가 예술가로 성장한 이후 자연은 그녀 작품의 단골 소재가 됐다. 

오키프는 10살 때 이미 미술을 평생 함께 할 동반자로 선택했다. 어린 시절에는 미술교사에게 과외를 받았으며, 한창 이성에 관심이 높을 사춘기 때에도 오로지 그림에만 열중했다고 한다. 이렇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오키프는 시카고 예술대학에 입학한다. 

당시 회화는 남성이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키프 역시 처음부터 대단한 화가가 될 것을 꿈꿨다기보다는 다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소박하게 ‘미술 선생님’이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바람대로 1913년부터 1918년까지 학교와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하지만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를 만나게 되면서 그녀의 인생에 전환기를 맞는다. 

인생의 대전환점, 스티글리츠와의 만남 스티글리츠는 미국의 사진작가로, 사진계의 거장으로 명성이 드높았다. 어느 날, 조지아 오키프의 친구가 스타글리츠에게 그녀의 작품을 보여주었고, 이에 감명을 받은 스티글리츠는 그녀의 작품을 자신의 미술관에 전시하기에 이른다. 

이 일로 인연을 맺게 된 오키프와 스티글리츠는 점차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낀다. 결국 연인으로 발전한 오키프와 스티글리츠의 스캔들은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당시 오키프의 나이는 29세, 스티글리츠는 52세로 무려 23살의 나이 차가 있는데다, 스티글리츠는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와의 만남 이후로 진정한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며 작품을 인정을 받기 시작했지만, 이와 동시에 그녀와 그녀의 작품에 대한 오해 역시 끊임없이 쏟아졌다. 





세상의 편견, 꽃으로 맞서다 
웬 무명의 어린 여성 예술가가 스티글리츠의 높은 명성을 등에 업고 남성이 중심인 회화 예술계에 입성했다는 시선은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작품까지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이런 시선들은 스티글리츠와 오키프가 결혼을 했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스티글리츠가 개최한 사진 전시회에서 그들이 동거하는 동안 찍은 그녀의 누드 작품은 그녀의 이미지를 오해하도록 만드는 꼬리표가 됐다. 

오키프는 자신과 작품들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가볍게 오르내리는 것을 원치 않았고, 이에 적극적으로 해명하기보다 더욱 자신의 작품 세계에 몰두하며 작품으로써 이야기하길 원했다. 남성이 주류인 사회에서 사람들은 오키프와 그녀의 작품에 대해 “예쁘다”는 말로 비아냥거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오키프는 오히려 이를 피하지 않고 더욱 여성성을 앞세워 남성이 감히 흉내 내기 어려운 감성으로 예쁜 그림을 쏟아냈다. 당시 남성의 영향력을 벗어난, 따라 하기도 어려운 새로운 화풍의 등장은 남성들의 시기와 두려움을 자극했다. 

광활한 사막에서 거장으로 다시 태어나다 
스티글리츠와 결혼한 오키프의 행복도 오래 가지 못했다. 사물의 단순화를 통해 그 속에서 극대화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오키프의 작품들이 스티글리츠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그녀는 스티글리츠의 성을 따라 스티글리츠 부인으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고 자신을 ‘미스 오키프’라 불러달라며 정정하곤 했다.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쌓아가며 큰 예술가로 성장하던 오키프와 달리, 스티글리츠는 오키프보다 18살이나 어린 도로시 노먼과 사랑에 빠졌고, 이는 오키프에게 큰 상처로 남는다. 1946년 스티글리츠가 세상을 떠나자 오키프는 다사다난했던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뉴멕시코 산타페로 거처를 옮겼다. 

뉴멕시코는 이전부터 그녀가 사막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자주 방문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광활한 사막에 정착하면서 더욱 깊이 있는 명작들을 그려내게 된다. 그녀의 후기 작품들은 사물의 단순화를 극대화시킨 패턴으로 표현돼 추상성이 더 강조됐다. 

생의 말, 진정한 우정을 나눈 또 한명의 남자 
오키프의 삶에 스티글리츠 말고도 중요한 또 한 명의 남자가 있었다. 오키프보다 약 60살이나 젊은 예술가 ‘존 해밀턴’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녀는 80이 넘은 노년의 나이에 자신을 찾아온 20대 청년 해밀턴의 도움을 받아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하며 살아간다. 

해밀턴은 아침이 되면 오키프의 집으로 찾아가 함께 아침 산책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고, 늙고 병들어 눈도 잘 보이지 않았던 오키프를 대신해 운전이나 편지 쓰기를 대신해 주기도 했다. 

그들은 생각과 경험을 함께 나누며 점차 연인과 같은 관계로 발전해 나갔다. 외부에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악담이 쏟아졌는데, 이에 대해 해밀턴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자기 또래 사람들과도 진정한 우정을 나누지 못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예순 살도 더 많은 사람과의 우정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해밀턴은 갈수록 쇠약해지는 오키프의 몰락에 낙담해 다른 여인과 결혼하기도 했지만 그 뒤로도 여전히 오키프의 곁을 지키며 평생의 친구가 돼 주었다. 오키프는 1986년 100세 생일을 앞두고 숨을 거두었는데, 자신의 마지막을 지켜준 젊은 연인에게 그녀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오키프가 말하는 성, 그리고 평등
자신을 속박하는 수많은 시선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일생 동안 고군분투했던 조지아 오키프. 그녀가 진정 자유롭기 위해 선택한 길은 자신을 둘러싼 오해나 비난에 맞대응하며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오해와 비난이 거세질수록 더욱 자신의 신념을 굳건히 하고 작품에 전념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알아봐주기를 원했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과 싸우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통해 자유를 얻으려고 한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여성에게 투표권조차 없던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살았지만 “나를 도운 것은 남자”라 말하며 자신이 예술가로서 성취를 이루는 데 도움을 준 남자들에게 감사를 표하곤 했다. 



 “내 삶에서 언제나 나를 도왔던 사람들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 남자는 내 그림의 원천이기도 했다. 여자들은 나에게 어떤 유산도 남겨주지 못했다.” 

“평범하게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문득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내가 원하는 곳에 살 수도 없고 갈 수도 없으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말하고 싶다고 모두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남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진짜 중요한 것,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바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가부장적 사회에 순응하고 남성에게 의지하는 인물이라고 평해선 곤란하다. 오히려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독립하고 주체적인 개인으로서의 인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인이 된 그녀는 여성의 인권과 독립을 다룬 올리브 슈라이너의 저서 <여성과 노동>을 즐겨 읽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여성 참정권에 관한 기사를 찾아 읽기도 했다. 

또한 당시 미국에서 태동한 페미니즘과 여성의 권리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 부인이 여성 평등권 보장 법률안에 반대한다는 기사가 보도되자 바로 “평등권 사상을 연구하고 성 평등을 위해 일해 온 여성들 덕분에 지금 당신이 있는 것”이라며 항의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페미니즘 운동가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뜻을 함께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페미니즘이 여성 스스로를 고립된 상황으로 몰고 있다고 비판했다. 오키프는 진정한 페미니즘은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권리와 특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고 그것이 진정한 평등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무엇보다 여성의 경제력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독립된 개체로서 여성을 열렬히 신봉한다. 단지 남자처럼 똑같은 권리와 특권을 가졌다는 의미뿐 아니라 남자처럼 자기 인생에 책임감을 지닌 개체로서 말이다. 그러므로 여성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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