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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학기, 세종대왕을 춤추게 하다!

독서광 세종, 자유를 주니 훨훨 날아



지금으로부터 620년 전인 1397년, 사내아이의 탄생을 알리는 우렁찬 울음소리가 창덕궁 안을 가득 메웠다. 이 아이의 성은 이, 이름은 도로, 아버지는 고려조의 이름 높은 충신 정몽주를 살해하고 새 왕조의 길을 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해치운 젊은 왕자 이방원이며, 할아버지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였다. 

‘중요하고 귀한 책은 100번 정독한다’ 
도는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너무나 책을 좋아해 아버지와 어머니가 심히 걱정할 지경이었다. 그의 독서습관 가운데 후세까지 명확하게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은 바로 백독주의였다. '중요하고 귀한 책이면 100번을 정독한다.' 그것을 원칙으로 삼아 실천하고 있었다. 

‘매일 4경에 일어나 책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듯, 도는 스스로에 대해 가없이 엄격했다. 그런 만큼 세상의 원칙에 대해서도 매우 단호했다. 밑바닥 백성들에 대해선 매우 너그럽고 온정을 아끼지 않는 반면 강자에 대해선 꽤나 강직하고 비타협적이었다.

“편하게 놀기나 해라” 충녕대군의 자유학기제 
세월이 흘러 도는 왕위에 오른 태종을 위해 노래와 시를 올린 적이 있다. 그 때 아버지 왕이 충녕대군에게 그 내용을 물으니. 그가 매우 자세하게 답변하자 왕은 곧 말한다. "장차 세자를 도와 큰일을 결단할 자로구나!" 그러나 잠시 뒤 왕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이렇게 못을 박았다. "너는 세자처럼 할 일이 있는 사람도 아니니… 편안하게 즐기기나 하여라." 

먼저는 그의 재능을 인정해 형인 세자를 돕는 방식으로 세상에 나서는 것까지 허락해줄 것처럼 하다가 갑자기 더 그런 것 생각하지 말고, 편안히 살기나 하라는 것이었다. 더 이상 정치에 대해, 통치에 대해, 그 어떤 큰 꿈도 꾸지 말라는 사실상의 지엄한 '명령'이었다. 

그날부터 충녕대군 도는 확연히 달라지는 모습을 보인다. 먼저 그는 책 읽기 대신 새로 서화 수석 모으기에 손길을 돌렸다. 원래부터 그는 예기에 능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예술적인 재능도 뛰어나고 감성도 풍부했기 때문에 거문고와 비파를 탔다. 세상 여러 곳을 돌아다녀 보기도 하고, 틈틈이 병서를 읽어보면서 이제까지의 병서들이 지휘관의 관점으로만 기술됐다는 한계를 깨닫고 그 대처방안을 고민하기도 했다. 

보통 왕자의 경우 공개적인 직책을 맡아 정치전면에 나서는 일은 하지 않았지만, 충녕이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외국 사신의 접대 등 국빈 영접에 나서는 일은 적지 않았다. 또한 주역을 깨우치고 스스로 점을 치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갖가지 잡학에 열중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동생 성녕이 병이 들자 스스로 공부한 의술을 바탕으로 유명 산지를 돌아다니며 약초와 버섯을 찾아와 약을 조제하는 등 실전적인 경지까지 나아가기도 했다. 술도 제법 즐겼던 것으로 알려진다. 충녕대군 도는 그처럼 이제까지의 엄격하고 틀에 짜인 생활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여러 가지를 시도하고 경험했다. 

오늘날 '자유학기제'와도 같은 성장기의 도전과 실험에 나서본 셈이다. 이런 생활을 통해 그는 아버지 태종의 명령을 사실상 잘 지키면서 자칫 낙심하거나 삐뚤어질 수도 있는 자신의 심성을 새롭게 다스려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진짜 자유학기제, 위대한 지도자 세종을 탄생시키다 
마침내 그는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태종이 양녕을 세자에서 내려앉히고 충녕을 세자로 삼은 뒤 2달 만에 왕위까지 물려준 것이다. 그가 22살 때 일이다. 충녕대군의 이러한 '자유학기'가 그의 성장에 긍정적으로 미친 점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1. 다양한 인재에 대한 안목을 넓히면서 그런 인재들의 잠재역량을 알아보고 활용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 


2. 세상을 이루고 작동하는 다양한 요소에 대해 나름대로 풍부한 이해를 가지게 되면서 보다 훌륭한 왕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기를 수 있었다. 

3. 특히 나라를 경영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백성을 바로 세우고 잘살게 하는 것이라는 통치관을 세우게 됐다.

4. 그 백성들을 잘살게 하는 물질적 수단으로서 경제 및 산업, 조세, 국방 등을, 그 백성들의 소통 수단으로서 좋고 유용한 문자의 정립 등을 최대의 국가과제로 삼는 데로 나아갔다. 



나중에 왕이 된 뒤 집현전 학자들에게 왕의 명령으로 '사가독서'라는 이름의 유급휴가를 준 것도 이때의 경험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방안이다. 또한 인재를 고르고 씀에 있어 출신이나 계급을 그다지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판단하고 결행한 것도 이때의 경험과 마음가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을 내려놓고 자유로운 정신 속에서 넒은 세상과 다양한 인간들을 바라보고 경험한 것은 실제로 나중에 그에게 큰 자양분이 된다. 그가 뛰어난 과학 능력을 지닌 장영실이라든가 놀라운 수학 능력을 지닌 이순지라든가 김 담 같은 천재들을 알아보고 중용하는 눈을 가지게 된 것도 이때의 영향으로 보인다.

'세상은 넓고 인재를 많았다.' 자칫 그가 왕가출신의 책상머리 엘리트로서, 고전과 유학자들의 강론만으로 이뤄진 세자교육 같은 데 매몰된 채 박제화된 제왕에 그칠 수도 있었을 위기를 바로 이 시기 이 경험들이 막아주었던 셈이다. 

창조적 폭발의 산물 한글, 620년 전의 조선과 모바일 시대를 잇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과 지식들을 바탕으로 세종대왕은 우리의 보물 ‘한글’을 창제하게 된다. 발음할 때 변하는 혀뿌리와 입술의 모양을 본 따 만든 ㄱ, ㄴ, ㄷ…등 자음으로 이뤄진 초성에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등 모음의 중성을 결합시킨 뒤 다시 자음으로 된 받침의 종성을 덧붙이는 식으로 만드는 글자, 한글은 가히 '창조적 폭발', '과학적 팽창'의 집합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자음과 모음의 조합만으로도 엄청난 수의 글자가 조립되고, 다시 그런 글자들의 조합으로서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단어가 생성될 수 있다. 이러한 원리로 한글은 현재 세계 그 어떤 글자보다도 세상에 있는 모든 소리를 그 원음에 근접하게 표기할 수 있으며, 21세기에 들어서 컴퓨터의 자판, 더 나아가 휴대폰의 자판과 최고로 조응하고 호환될 수 있다. 자유학기를 보내며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쳤던 세종이 620년의 세월을 지나 '세계의 기적'으로 우리에게 다시 살아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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