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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만 남은 인간의 자화상, ‘꺼삐딴 리’

힘 있는 것에 기대 주체성을 망각한 채 살아가는 자들의 병든 인식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격동의 시대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물지 않는 상처를 안겼다. 하지만 그 시간 속에서 어떤 이들은 상황에 따른 기막힌 처세술로 지금까지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어 견고한 부(富)를 누리고 있다. 자신의 주체성을 버리고 강자에 기생하며 연명하는 그들의 실체를 소설가 전광용의 작품, ‘꺼삐딴 리’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1919년 3월 1일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출생해 193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별나라 공주와 토끼>로 등단했다.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국문과에 입학해 <시탑>, <주막>의 동인으로 문학 활동을 하다가,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흑산도>가 당선됐다. 이후 서울대 교수를 거쳐, 서울대 문리대 문학부장이 됐으며 1988년 6월 21일 7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저서로는 단편집 <흑산도>, <꺼삐딴 리>, <나신>과 장편 <창과 벽>, <태백산맥> 등이 있다. 



‘꺼삐딴 리’는 누구일까?
1960년대, 서울 도심에 위치한 유명 고급병원의 병원장인 이인국 박사는 치료비를 다른 병원의 배로 받으면서 부유층과 권력층 환자만 골라 상대하는 인물이다. 그는 수술을 마치고 개운치 않은 기분을 느끼고 있다. 이후 미국 대사관의 브라운씨를 만나러 가기 전 회중시계를 바라보며 과거를 회상한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이인국 박사는 일본의 도쿄 의과대학을 나왔다. 회중시계는 졸업의 부상으로 받은 물건이다. 잠꼬대도 일본어로 할 정도로 열성적인 친일파 이인국 박사는 대학을 졸업한 이인국 박사는 평양에 병원을 차리고 운영했다. 그는 돈과 권력을 쥔 일본인이나 친일 조선인 부호만을 치료하며 부유한 생활을 해왔다. 반면 가난하거나 힘없는 조선인은 가차 없이 내쫓아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일본이 물러나게 되면서 이후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고, 친일파의 색출과 처벌이 시작됐다. 이때 하필이면 자신이 치료를 거부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춘식에게 걸린 이인국 박사는 친일파로 찍혀 형무소로 끌려가게 됐고, 그곳에서 소련군 병사에게 애지중지하던 회중시계를 빼앗기게 된다. 뿐만 아니라 온갖 욕설과 구타에 시달리던 그는 죽을 위기에 처한다.

때마침 형무소에 이질 환자가 발생하는데 이를 치료할 만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 없자 형무소장은 이인국 박사를 불러 응급 처치실에서 일할 것을 명령한다. 

이인국 박사는 스텐코프라는 이름의 소련군 장교에게 잘 보이려 노력한다. 또 러시아어 교본을 구해 불철주야 공부에 매진하기도 한다. 스텐코프 장교의 마음에 든 이인국 박사는 그의 턱에 난 혹을 성공적으로 수술해 주어 환심을 샀다. 이때부터 그는 친소노선을 걷기로 결심했으며 아들에게 러시아어를 배우라 격려했다. 그리고 스텐코프의 추천으로 소련 정부지원을 받아 아들을 모스크바로 유학 보낸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아들과 소식이 끊기게 되고 아내마저 잃은 채 1.4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후 그는 서울 시내에 병원을 차리고 자신의 의술로 권력가와 부자만을 상대하면서 돈을 번다. 

자기 자신을 망각한 카멜레온 ‘꺼삐딴 리’ 
주인공 이인국 박사는 힘 있는 것들에 기대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 카멜레온 같은 기회주의자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철저한 친일파, 해방 직후에는 친소파, 한국전쟁 이후 월남하고 나서는 친미파가 돼 시류에 편승해 영화를 누리고 살아간다. 

소설은 주인공의 삶을 통해 민족의 수난기를 자신만의 안녕을 위해 살아온 전형적인 인간을 풍자하고 있으며, 이는 인간의 노예성을 비판함과 동시에 민족의 비극을 암시하기도 한다.

‘꺼삐딴’은 영어의 ‘captain’에 해당되는 러시아어로, 해방 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들이 쓰는 말을 흉내내어 쓴 것인데, 이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힘 있는 것에 기대 주체성을 망각한 채 살아가는 자들의 병든 인식을 묘사한다. 

그의 인물 됨됨이를 여실히 드러내는 문장은 그가 미국 대사관에 귀중한 골동품을 선물하고 국무성 초대 비자를 허락받으면서 의기양양해 돌아오는 길에 했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흥, 그 사마귀 같은 일본놈들 틈에서도 살았고, 닥싸귀 같은 로스케 속에서도 살아났는데, 양키라고 다를까....... 혁명이 알겠으면 알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구, 아직 이 이인국의 살 구멍은 막히지 않았다. 나보다 얼마든지 날뛰던 놈들도 있는데 이쯤이야........." 

회중시계와 운명을 같이 하는 이인국의 삶
회중시계는 이인국 박사가 제국대학을 졸업할 때 받은 부상으로, 뒷면에는 자기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는 의사로서의 자기 실력에 대한 자부심을 표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해방 이후 이인국 박사는 형무소에 잡혀가 소련군 병사에게 회중시계를 빼앗긴다. 순간 그는 ‘죽음과 시계......’라 고 읊조린다. 시계를 잃는다는 것은 곧 박사에게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스탠코프에 의해 시계가 그의 손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크게 기뻐한다. 형무소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그가 다시 살아나게 된 기회에 시계 역시 돌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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