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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미대’ 합격만 했어도 제2차 세계대전은 없었다?

희대의 독재자가 이루지 못한 미술가의 꿈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 그는 전 세계적으로 ‘독재자, 악마, 살인마’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또 다른 모습은 바로 ‘예술인’으로서의 면모이다. ‘히틀러’와 ‘예술’.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단어의 연결고리를 찾아 가보자.

히틀러의 어린 시절 꿈은 ‘화가’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국경 부근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세무 공무원이었는데 아들이 자신과 같이 공무원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열렬한 화가 지망생이었다. 당시 그는 웅장한 건물을 스케치하는 것에 매료돼 있었으며 미대 진학을 희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강압으로 인해 아돌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린츠의 실업계 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열망을 버릴 수 없었던 그는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나 그곳의 빈 국립미술아카데미에 두 번이나 지원했지만 두 번 모두 학교 측으로부터 입학을 거절당한다. 오히려 교수는 히틀러의 그림을 보고 ‘건축에 더 재능이 있는 것 같으니 건축가가 되라’는 조언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그림을 그리며 ‘아돌프 히틀러의 자화상’, ‘성모 마리아와 유년 시절의 예수’, ‘바다의 야상곡’ 등 다수의 그림을 남겼다. 하지만 어머니까지 사망한 이후 노동자 합숙소와 싸구려 하숙집을 전전하다가 24세가 되던 1913년, 화가의 꿈을 접고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독재자가 된 후에도 미술에 집착한 히틀러

한편 정치의 길로 방향을 튼 후에도 히틀러는 화가로서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 후 히틀러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한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 일행에게 히틀러는 “나느 정치가가 아니라 예술가입니다. 폴란드 문제가 해결되면 나는 예술가로서 내 인생을 끝낼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는 나치 지도자로 활동하며 순수미술을 억압하고 나치미술을 선전에 이용하는 도구로 삼기도 했다.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거나 아기를 낳아 혈통을 보존하는 어머니상, 국가를 위해 노동하는 모습 등이 주를 이뤘으며 나치사상을 전파하는데 사용됐다. 

그 외의 순수미술은 ‘퇴폐미술’이라고 하며 억압하기 시작했다. 1937년 나치는 다수 작가들의 작품을 ‘퇴폐미술’로 규정하고 조롱한 대규모 전시회를 개최했는데 이 전시회가 바로 ‘퇴폐예술전’이다. 이 전시회에 포함된 작가들은 파블로 피카소,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마르크 샤갈, 에드바르 뭉크, 바실리 칸딘스키 등 예술의 거장이라 불리는 작가들의 작품이 대거 등장했다. 



한편 히틀러가 그린 디즈니의 그림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그림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린 그림으로 디즈니가 1937년 상영한 최초 장편만화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그린 것이다. 또 1940년 디즈니 만화 ‘피노키오’에 나오는 피노키오를 그린 작품이 발견되기도 했다.

일생동안 미술과 집요하게 얽혀있던 히틀러. 과연 그가 원하던 미술학교에 입학했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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