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남기려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

그들은 왜 크토록 역사를 위해 고군분투 했을까



궁형의 부끄러움을 견디면서도 역사 저술의 길을 선택한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은 역저 <사기>의 ‘태사공 자서’에서 역사가 국가라는 공동체에 던지는 의미를 이렇게 적고 있다.

“<춘추>는 문자가 수만 자로 이뤄졌으나, 그 뜻 또한 수천 가지나 됩니다. 만물이 흩어지고 모이는 것이 모두 <춘추>에 있습니다. <춘추>에만도 임금을 시해한 것이 36건이고, 나라를 망친 것이 52건이나 되며, 제후가 망명해 그 사직을 지키지 못한 경우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를 살펴보면, 모두 근본을 잃었기 때문입니다….‘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는 것은 하루 아침 하루 저녁의 원인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그 원인이 쌓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나라를 가진 자는 반드시 <춘추>를 알아야만 합니다.”

역사는 지나간 과거가 문자로 남겨진 것이다. 그렇게 남은 수많은 자료들은 수천 년을 거쳐 21세기 현재 책과 온라인상에 살아남았다. 그러나 역사는 과거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취미로 몇 자씩 끄적거린 것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과거를 교훈 삼아 현재를 제대로 살고, 미래를 착실히 준비하자는 선조들의 피나는 노력이 담겨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일부는 목숨을 잃는 상황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그토록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피와 땀과 눈물을 쏟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삼형제의 목숨과 맞바꾼 제나라의 역사
중국 역사서 <좌전>에 실린 태사 삼형제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에 정변이 터졌다. 오늘날의 장관 격에 해당하는 대부 지위에 있던 실력자 최저(崔杼)가 제나라 왕, 장공(莊公)을 죽인 것이다. 유혈 쿠데타를 일으킨 최저는 장공의 동생 경공(景公)을 왕으로 내세웠다. 

새로 왕이 된 경공을 비롯한 제나라 전역은 최저라는 무시무시한 권력자로 인해 공포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한 사람만은 이 공포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인 제나라의 태사(太史)였다. 태사는 자기 책무를 다 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했다. “최저가 그의 임금을 살해했다.” 

권력자 최저는 격분했다. 그는 곧바로 태사를 잡아 죽였다. 태사 직은 대대로 세습되던 당시의 엄격한 전통에 따라 태사의 동생이 이어받았다. 최저는 형인 태사가 주살당하는 것을 목격한 동생이 감히 자신에게 다시 도전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생은 붓을 들고 그의 형과 똑같이 적었다. “최저가 그의 임금을 살해했다.” 

동생도 역시 형처럼 최저에게 주살 당했다. 죽은 두 태사의 셋째 아우가 세습에 따라 다시 태사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는 두 형이 주살당하는 것을 목도했는데도 역시 두 형과 똑 같이 기록했다. “최저가 그의 임금을 살해했다.” 

셋째 아우까지 기록을 멈추려 하지 않자, 천하의 잔학무도한 권력자 최저도 어쩔 수 없이 두 손을 들었다. 기록의 말살을 단념하고 만 것이다. 한편, 지방에 있던 낮은 직급의 다른 역사기록관인 사관도 태사가 차례로 살해됐다는 소문을 듣자 스스로 기록 판을 들고 수도 임치(臨淄)로 달려왔다. 그는 셋째 아우인 태사에 의해 기록이 제대로 지켜졌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비로소 지방으로 돌아갔다. 

한편, 고대 중국에서 역사, 바꿔 말해 역사의 기록행위는 최상급의 가치를 부여받은 채 매우 엄격하게 관리됐 다. 태사를 비롯해 사관은 군왕의 행동을 기록하는 좌사, 군왕의 말을 기록하는 우사로 분리돼 있었다. 

이런 분류 메커니즘에 따라 좌사가 기록한 것이 <춘추>가 되고, 우사가 기록한 것이 <서경>이 됐다. 중국 역대 왕조에서 과거 등을 통해 고급관리를 등용할 때 필수과목이었던 사서오경의 핵심 경전 두 가지가 바로 역사서이고, 그 경전을 바로 사관이 기록했을 정도로 권위를 부여받았다. 

이처럼 국가가 역사의 기록을 국가대사로 인정하고 기록관(사관)을 공무원으로 삼아 활용하는 전통은 중국을 시작으로 한국 일본 베트남 등에 각각 다양한 형태로 자리 잡아 나가게 된다.

역사에 인생을 바친 두 역사가 
서양에서도 역사는 엄중하고 치열한 노력 속에서 기록됐다. 그런데 동양과 달리 서양에서 주요한 역사서를 남긴 저자는 귀족 출신으로 개인적인 책임감과 결단에서 기록을 해 나갔다는 성격이 보다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이 차이난다. 초기 서양 역사 기록에 큰 기여를 한 공로로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토스(Herodotos)또한 그렇다. 

그는 기원전 490~480년 사이에 있었던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을 다룬 <역사>(Historiai/ The Histories)를 저술하면서 페르시아 제국의 여러 곳과 이집트 그리스의 대다수 도시국가들을 누비며 자료를 모으고 유명한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중국의 태사와 달리 그는 전 생애를 그 어떤 나라의 봉록도 지원금도 없이 역사를 기록하는 대 작업을 이루는 데 쏟아 붓는다. 

헤로도토스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후배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쟁을 다룬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거의 대부분을 망명생활 속에서 집필했다. 그 역시 국가로부터 어떤 보상이나 혜택도 받지 않고 오랜 고난 속에서 집필 작업을 이어나간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아테네의 장교였던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 트라키아 해변의 암피폴리스(그리스 북부 불가리아 접경지대)를 구출하는 작전에 나섰다가 작전에 실패하게 된다. 자신의 군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 지역민들이 스파르타 군에 항복해 버린 것이다. 이후 그는 20여 년 동안이나 망명해야 했지만 낙심하지 않았다. 

자신과 동료들이 참여했던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전쟁에 대한 글을 쓰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아테네로부터 쫓겨났다는 사실을 활용해 아테네와 대립한 여러 도시국가들을 보다 자유롭게 여행하고 취재하는 등 저술의 집념을 이어나갔다. 

개인적인 책임감과 결단으로 기술해 나갔던 서양 역사 역시 ‘정확성’과 ‘진실’이 기본원칙으로서 존중됐다. 이는 헤로도토스가 자신의 대표저작 <역사>에 그리스어로 ‘의문’, ‘조사’라는 뜻을 지닌 ‘hisroriai'라는 단어를 붙여 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투키디데스는 헤로도토스의 한계를 극복하고 역사기술을 보다 엄밀하고 정확하게 해나가는 길을 열어 ’과학적 역사가‘의 시조로 불리기에 이른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두 사람의 정신은 로마의 플루타르코스, 타키투스를 거쳐 서양의 역사전통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역사의 가치 잊지 말아야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대 지배자들은 지배자대로, 학자는 학자대로, 혁명가는 혁명가대로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지혜와 교훈을 천착해 미래의 길을 열어나가려 분투를 거듭했다. 역사가의 분투 속에 살아남은 역사는 그 후, 수천 년 동안 인류 문명을 존속시키고 인류의 미래를 밝히는 소금이자 등대로 기능해왔다. 

청나라 치세의 전성기 ‘강건성세’를 낳은 것은 황실 자제들에게 철저한 역사와 유학 교육을 시킨 데 힘입은 바가 매우 크고, 마르크스와 레닌이 유물사관과 역사적 유물사관을 세우는 데는, 런던과 제네바의 도서관에서 독파한 수많은 역사서적과 치열하게 씨름한 것이 결정적인 힘이 됐다. 

이제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달과 인권의 비약적 신장 등에 힘입어 21세기 인류에게 역사는 장소와 시대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과거와 달리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그 누구든지 역사의 날개를 타고 과거로 마음껏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수많은 역사 이야기가 사실은 얼마나 위험하고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 속에서 기록됐는지, 후대를 위해 흘린 피, 땀, 눈물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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