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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모든 문화 현상, 자유로운 '놀이'로부터 나온다!

요한 하위징아가 말하는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의 하루가 온통 공부로 흘러가는 학생들은 노는 법조차 까먹을 지경이다. 오히려 잠깐 드라마에 한 눈을 팔거나 친구와 온종일 붙어서 온 동네 구석구석을 헤매고 돌아다닌 날이면 칼날 같은 죄책감이 마음을 쿡쿡 찌른다. 그러면 또 울며 겨자 먹기로 책을 펴고 올빼미 공부를 한다. 이럴 때 누군가 “인간의 본질은 생각하는 것이나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노는 것’에 있다!”고 말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요한 하위징아’이다. 과연 그는 누구이고, 그가 주장하는 ‘호모 루덴스’란 무엇일까?


요한 하위징아는 누구?


요한 하위징아는 네덜란드 역사가이며 철학자이다.그는 1872년 네덜란드 북부 흐로닝언에서 태어나 의학을 전공한 아버지 밑에서 일찍이 문학, 미술, 역사에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흐로닝언 대학에 들어가 비교언어학을 전공한 그는 학위 획득 후 할렘의 고교 역사교사로 근무했다. 또한 흐로닝언 대학과 레이던 대학에서 역사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요한 하위징아의 저서 <호모 루덴스>는 그의 또다른 저서 <중세의 가을>, <에라스무스>, <문화사에의 길> 중에서도 인간과 문화의 연구에 평생을 바친 그의 역작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모든 문화의 기원을 ‘놀이’에서 찾았다. 문화 현상의 기원을 놀이에 두고, 역사적인 접근 방법으로 자신의 다양한 지식을 동원해 인류의 문화를 놀이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다? 

우리는 현생인류를 가리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즉, 사람은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이성적인 동물로서 다른 동물과 구분된 특징을 갖는다는 것이다. 


합리주의를 숭상하던 18세기 사람들의 주장과 달리 세월이 흐르며 인류는 그리 합리적이지 못한 존재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현대인을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물건을 만들어내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역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많은 동물들 역시 자신들의 생존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 하위징아는 인류를 보다 정밀하게 정의하기 위해 ‘호모 루덴스’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이 용어는 인간이 가진 모든 문화의 기원을 ‘놀이’라는 관점에서 찾는 것에서 출발한다. 


'놀이'가 인간의 모든 문화의 시작이다! 

요한 하위징아는 인류의 모든 문화 현상의 기원을 ‘놀이’에서 찾았다. 그는 ‘문명이 놀이 속에서(in play), 그리고 놀이로서(as play) 생겨나고 또 발전해왔다’고 저술하고 있다. 한 일화로 그가 문화에 대해 강연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강연제목이 ‘The play of Culture’였다. 



이처럼 하위징아는 놀이에 따르고, 승복하고, 또 놀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인간의 문명을 이끌어왔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몸과 영혼을 통해 사물을 표현하려는 자연스러운 욕구에서 발생한 놀이는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 원동력을 통해 종교와 법률, 경기, 예술들이 탄생한 것이다.


‘호모 루덴스’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다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가 가진 특성으로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파베르의 관점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특징을 설명했다.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의 놀이를 ‘자유, 상상력, 무관심성, 긴장’ 네 가지 특징으로 설명한다. 


놀이는 대단히 자유롭다.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을 때는 멈추면 된다. 노동이나 공부와 달리 놀이는 스스로 할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또한 놀이의 가장 큰 특징은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가령 아이들의 놀이를 살펴보면 실제 엄마, 아빠가 아닌데도 그런 상황을 가정하고 소꿉장난을 하는 것 처럼 실제 삶의 현장을 벗어나 상상력을 전제로 한 세계에서 활동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놀이의 ‘무관심성’은 목적성이 없음을 뜻한다. 노동은 금전적인 이득을 위한 것이라면 놀이는 ‘놀이’ 그 자체가 목적이다. 따라서 어떤 이해관계나 다른 목적이 없더라도 ‘놀이’자체를 위해 활동할 수 있다.


마지막은 ‘긴장’이다. 놀이는 긴장과 안정이 대조적으로 나타나며 변화해간다. 여기서 우리는 욕망과 용기, 끈기, 역량, 공정성을 배울 수 있다.


이 특징들을 한 마디로 정리해보면 ‘놀이’는 어린 아이가 하는 잘 짜여진 어떤 활동들을 벗어나, 인간이 자발적으로 상상력을 맘껏 발휘해 그 자체만으로 즐거움을 느끼고 경쟁과 화합을 경험할 수 있는 모든 활동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류의 문화는 놀이에 기반을 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놀이하는 인간’의 한계 

한편 호모 루덴스의 한계를 지적하는 시각도 있다. ‘놀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부분이다. 그런데 이를 과연 어디까지 전 인류에 걸친 ‘문화’라는 광범위한 범위로 확장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가 남는 것이다. 각박하고 여유가 사라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말이 잘 와 닿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기도 하다. 


현대 사회에서 놀이는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노동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또 현대인들은 놀이공원이나 노래방 등 잘 짜인 놀이 세계를 돈을 지불하고 이용하기 때문에 호모 루덴스에서 말하는 진정한 놀이보다는 자신이 호모 파베르임을 잊게 하는 마취제에 가깝다고 하기도 한다. 따라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은 ‘놀이’와 ‘유희’를 인간의 본질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호모 루덴스의 진정한 매력을 느껴라! 

요한 하위징아도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파베르를 모두 배제하고 호모 루덴스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의 두 가지 관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만의 특징이 존재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오히려 하위징아는 호모 파베르가 지배하는 세계를 호모 루덴스로써 비판했다고 볼 수 있다. 


무엇이든 생산을 하고, 노동을 해야 하는 호모 파베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논다’는 것은 의무에 충실하지 못한 ‘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호모 루덴스를 제시함으로써 ‘놀 줄 모르는 병든 시대’의 탈출구를 제시하고자 했다. 


따라서 호모 루덴스는 진정한 행복을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할 수 있다. 앞만 보고 쉼 없이 달려가는 사람들이 잠시나마 숨을 고르고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호모 루덴스’가 가진 매력이자, 진정한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에듀진 기사 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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