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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당한 조선의 왕 '인조', 그에게 배울 점은?

권력다툼 아닌 국가의 안위와 삶을 염려해야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는 군신관계, 형제관계 등 형식상 서열이 있어왔다. 조선과 후금은 1627년 일어난 정묘호란 이후 형제관계를 맺어 비교적 평등한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후금이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꾼 뒤에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청나라는 이제 조선에게 형제관계가 아닌 군신관계가 돼 자신들에게 예를 갖추라고 요구할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무리한 세폐와 정병까지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은 계속되는 부당한 요구에 더 이상 굴하지 않고 그들을 오랑캐라고 업신여기며 무시한다. 이러한 푸대접이 계속되자 결국 청 태종은 10만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입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한성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남하 하는 청군을 피해 추운 겨울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조선의 운명을 결정해야하는 인조. 이를 둘러싸고 척화론의 ‘김상헌’과 주화론의 ‘최명길’ 두 대신이 첨예하게 맞선다. 이 둘은 어떤 주장을 펼쳤으며 인조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척화론(斥和論), “명을 배반하고 오랑캐(청)를 섬길 수는 없다!”
척화론의 구심점이 됐던 인물은 김상헌으로, 그는 조선후기 절개와 지조의 상징으로서 선조부터 효종까지 관직을 도맡았던 선비이다. 때문에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 모두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

김상헌은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을 때도 66세의 나이로 뒤따라가 ‘척화’와 ‘항전’을 주장했다. 예의와 삼강은 인간사회의 기본 질서이며, 명을 배반하고 오랑캐인 청을 섬기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항복은 곧 조선이란 국가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것이며 가당치 않은 굴욕이라고 여겼다.

‘척화론’은 많은 대신들과 사림의 지지를 얻게 됐고 계속해서 청의 요구를 들어줄 경우 나중에는 더 과도한 요구를 할 것이라는 의견까지 보태져 국가의 흥망과 전쟁의 승패보다는 ‘맞서 싸우기를 불사해야 한다’라는 의견으로 모아지게 됐다.

주화론(主和論), “백성의 안위를 위해 화친해야 한다!”
이처럼 척화론이 대세 이론으로 떠오르는 가운데, 한쪽에서는 ‘전쟁이 막대한 피해를 가져올 것이 분명한데 현실을 파악하고 최대한 청과의 화친을 모색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것이 바로 ‘주화론’이다. 주화론은 척화론과 반대로 사대의리나 삼강의 중요성보다는 현실적 피해를 줄이는 데에 주력했다.

이 주장의 대표적인 인물인 최명길이 관직에 있을 당시의 조선은 정치·경제·사상 모두가 급격한 변화를 겪던 시기였으며, 이미 두 번의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해지고 신분질서가 붕괴돼 가던 중이었다.

그런 그에게 전쟁은 모든 방면에서 득보다 실이 많은 싸움이었기 때문에 하루빨리 청과의 전쟁을 종식하고 피해를 줄여야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청군에 대항할 만한 군력이 없는 지금 더 싸우게 되면 나라 자체가 망할 것이기에 당장은 비굴하더라도 나라만은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주장으로 주화론자인 최명길은 척화론자인 김상헌과 첨예한 대립을 하게 된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 청에 항복하기로 결정하다
인조는 막강한 청나라 군대를 피해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한다.

하지만 항전이 길어지는 만큼 조선군은 힘을 내지 못하고, 한 겨울의 맹추위, 점차 바닥을 보이는 식량은 인조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강화도가 함락되고 세자가 인질로 잡혀갔다는 소식까지 들리면서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하자 대세는 주화론으로 기울게 된다.

결국 인조는 병자호란 발발 45일 만인 1637년 1월 30일, 항복을 결정하고 남한산성에서 나와 평민이 입는 남색 옷을 입은 채로 지금의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삼전도까지 걸어가 청 태종 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그리고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즉,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림으로써 굴욕적으로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굴욕적인 항복식 당시 청 태종은 머리를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며 다시 할 것을 요구했고, 인조는 이마에 피가 날 때까지 머리를 바닥에 조아려야만 했다.

백성을 위해 굴욕당한 인조, 현대에 시사하는 바는?
한편, 임진왜란(1592)에 연이은 두 번의 호란(1627, 1636)으로 백성들은 삶의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전쟁 이후 국토의 대부분은 황폐화 돼 농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졌고 나라의 재정에도 위기가 닥칠 정도로 심한 경제난을 겪게 됐다.

게다가 수많은 백성과 군사가 죽거나 다치고, 포로로 끌려가 인구수도 크게 감소하기까지 했다. 많은 건축물이 불에 타 사라지고 귀중한 문화재들은 약탈당했다. 조선은 그야말로 폐허나 다름없었고 인조와 중앙조정은 전란의 피해를 극복하는데 힘써야하는 상황이었다.

척화론과 주화론의 대립은 결국 ‘어떻게 하면 조선을 구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서 시작된 논쟁이다. 한 나라의 왕인 인조와 김상헌과 최명길이 몸담은 조정은, 당시 조선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다. 현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한 국가를 이들은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국정에 임해야 한다. 자신들의 가문과 세력다툼이 아닌 국가의 안위와 백성들의 삶을 위해 누구보다 노력해야 그들의 나라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척화론’은 과연 현실을 외면한 이상론에 불과했던 걸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척화론은 ‘유교적 명분과 명과의 의리를 내세운 이상론 혹은 원칙론’으로, 주화론은 ‘투철한 역사적 사명을 바탕으로 실리를 따졌던 현실론’에 가깝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현대적 가치관과 인식론에 입각해 평가한 것일 뿐, 최근에는 전혀 다른 시각의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외부의 부당한 요구, 더 나아가 침략 행위에 대해 강렬하게 배척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대응이다. 결국 중원을 장악해 안정적으로 지배하게 된 것은 청나라였지만, 호란이 발생하던 당시에는 후금과 청이 아직 중원으로 진출하지 못했고 명나라도 아직 건재하던 때라서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 역시 유동적이었다.

​또한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선은, 광해군과 인조대 초반에 걸쳐 후금의 침략을 예상하고 그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 대상이 건국 이래 조선의 휘하라고 여겨져 왔던 오랑캐였지만, 외적의 강압과 침략 가능성에 대해 기본적으로 국정 지배층이 척화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기도 하다.

더구나 인조 정부는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했던 광해군의 외교를 명의 재조지은에 대한 배반이라고 공격해 왕의 자리에 오른 상태였다. 또한 반정공신 가운데 최명길, 이귀 등과 같은 주화론자 역시 전술적 차원에서 주화를 선택한 것이지 척화의 정당성에는 공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인조대의 상황에서 청나라의 일시적인 강압이 있다고 해 명과의 관계를 쉽게 단절한다는 것은 근시안적인 선택이 될 수도 있었다. 주화 혹은 사대의 전략은 일단 청나라의 강압을 배척하는 과정에서 형세를 가늠해본 뒤에 결정해도 되는 외교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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