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평창 올림픽과 자아실현의 세대 차이



스포츠가 나라 상황과 별개로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올림픽의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히틀러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체제 선전의 도구로 활용했다. 한국의 경우 한일 국교 수립이 임박한 상황 에서 참가가 결정된 1964년 도쿄 올림픽이 국내 여론을 뒤흔들어 놓 았다. 이 올림픽은 일본에게도 중요했는데, 일본은 도쿄 올림픽 마지막 경기로 마라톤이 아니라 일본의 전략 종목인 여자 배구를 배치했다. 소련과의 결승전은 66.8%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주최 측으로선 다행스럽게도 일본팀이 소련팀을 3:0으로 완파했다.

88올림픽에서 소련을 응원했던 사람들

88올림픽은 그 자체로 냉전 구도의 축소판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전 세계에 홍보하겠다는 목적을 숨기지 않고 여러 가지 노력을 경주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오히려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당시 남한 내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의 노력이다.

애초 올림픽 개최 자체를 극렬히 반대하던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은 점점 ‘현실론’으로 전략을 수정해 나갔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세계가 아니라 소련을 응원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전 세계에 ‘메시지’를 전하려 했던 것이다. 마침 남자농구 준결승전에서 미국팀과 소련팀이 맞붙는 빅 매치가 성사된다. 일반 국민들조차 묘한 반미감정을 갖고 있던 터라 한국인들은 실제로도 소련 팀을 응원하는 사례가 많았다. 공산주의 운동권 세력은 다만 그 응원의 목소리를 한 군데로 규합해 폭발력을 높이는 역할을 수행하면 될 정도였다. 결국 ‘소련을 응원하는 한국’의 그림을 전 세계로 송출하는 작업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한 가지 반전은 오히려 이 작업이 ‘소련 붕괴’에 일조했다는 점이다(황성준 ‘유령과의 역사투쟁’ 참고). 소련인들은 본인들을 응원하는 한국인의 행동에서 고마움을 느낀 게 아니라, 분명 미 제국주의 체제에서 신음하고 있어야 할 한국인들의 건강함과 당당함에 쇼크를 받았다.

TV 화면이 보여주는 한국의 모습 또한 발전되고 청결했다. 소련에 대한 한국의 열렬한 응원은 오히려 소련인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의문을 싹틔우는 계기로 작용했다.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말한 자유와 풍요는 소련이 아니라 ‘미국의 식민지’ 한국에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달라진 ‘국가대표’의 의미

지긋지긋한 가난이 극복되면서 스포츠는 ‘울분과 설움을 해소하는 도구’보다는 다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예를 들어 2002년 한일 월드컵만 해도 이미 한국인들은 4강 진출을 하나의 축제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후 피겨 김연아와 수영 박태환은 더 이상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들 스스로의 자아실현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들이닥친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아이스하키 남북한 단일팀 구성’ 사건은 미묘한 온도로 다가온다.

한 가지 특기할 만 한 점은 국내 정치판에서 이른바 ‘혁신세력’을 자칭하며 정권까지 잡은 현 정부가 이 해프닝에서만큼은 구세대의 정서를 대표하고 있다는 점이다. 젊은 시절 88올림픽 개최에 반대하며 소련팀을 응원했던 이들이 어느덧 ‘어른’이 됐지만, 이들은 여전히 올림픽을 체제 선전장으로 바라보는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했다. ‘386세대’라는 말로 대표되는 현 정부의 주요 구성원들은 이번 올림픽을 자신들의 강점이라 할 수 있는 ‘남북한 평화국면’의 선전장으로 활용하려 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이것이야말로 대학생 때부터 꿈꿨던 목표가 이뤄지는 ‘자아실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밑그림은 의외로 직접 땀을 흘리는 선수들의 반발에 덜미를 잡혔다. 생각보다 너무 거센 반발이 나오자 정부는 진심으로 당황한 것처럼 보인다. 이들의 머릿속에서는 아직까지도 국가대표 선수들이 국가의 지시를 받는 존재처 럼 보일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지금 세대의 선수들에게 있어 국가대표(國家代表)라는 말의 의미는 더 이상 ‘나라를 위해 운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정정당 당한 경쟁을 거쳐 국가를 대표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이 경쟁의 마지막에 타국의 국가대표들과 후회 없는 한판승부를 벌이는 것은 그동안 국가대표 선수들이 나라 안에서 꺾어온 경쟁자들을 위한 마지막 예 의이기도 한 것이다.

누가 ‘적폐’를 말하는가

죽을 고생을 해가며 경쟁의 정점까지 올라왔더니 느닷없이 ‘평화사절단’ 역할을 하라는 건 (아마도 남북통일의 필요성조차 의문시할 가능성이 높은) 어린 세대의 선수들에게는 불공정 그 자체인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적폐청산을 부르짖으며 집권한 정부가 올림픽을 정치의 도구로 활용하는 ‘적폐’를 요구하는 이 아이러니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88올림픽 때의 소련 응원이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를 불러온 것처럼, 이번 평창 올림픽의 ‘평화 연출’ 역시 애초 기획의도와는 다른 효과를 낼지도 모를 일이다. 부디 선수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박탈감보다는 성취감을 느끼길, 각자의 인생에서 빛나는 순간들을 간직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이원우 미디어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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