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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뉴스

[서민수 경찰관의 요즘 자녀學]아이들이 ‘돌려막기’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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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부모님 신분증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주면 대출을 해 주겠다”라는 식으로 10대 아이들을 속여 수억 원을 가로챈 일당이 붙잡혔습니다. 최근 지상파 방송에서도 관련 내용이 방영된 바도 있습니다. 검거된 범인들은 급전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부모님 전화에 원격조종 앱을 설치하게 한 후 아이들에게 받은 부모의 신분증 사진으로 공인인증서를 발급받아 인터넷 대출을 신청해 7억여 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소위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엄마론, 아빠론’의 실체입니다.

피해를 본 아이들은 대부분 100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이나 값비싼 ‘굿즈’를 구매하기 위해 범인과 접촉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손쉽게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꼬임에 넘어가 친구에게까지 자랑하며 소개해줬던 것이 결국 피해를 더 키운 꼴이 되었습니다. 검거된 범인 대부분은 20대 초반이었고, 이미 학창 시절부터 인터넷 대출을 받아본 경험이 있었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럽지만, 아이들의 ‘이상한 돈거래’가 시작된 건 사실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저는 2016년 한 어머니로부터 “아이가 동네 형한테 10만 원을 빌렸는데 한 달 만에 45만 원을 갚아야 한다고 합니다”라는 문자를 받은 적도 있고, 한 아이로부터 “동네 형들한테 돈을 빌렸는데 금액이 커져서 새벽에 집 앞까지 몰려와 겁을 준다”라는 불법 추심에 관한 메신저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 두 아이 모두 명품을 사기 위해 사이버 도박에 손을 대면서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게 되었고, 빌린 돈을 갚지 못하자 동네 형에게 부탁하여 ‘돌려막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아이가 ‘돌려막기’를 해가며 돈을 빌렸던 이유는 ‘사이버 도박’이었지만 결국은 ‘돈’ 때문이었습니다. 2016년 당시 한 학급에서 한두 명 정도 하던 사이버 도박은 2020년 현재, 10여 명 이상이 이미 해본 경험이 있거나 하고 있을 정도로 확산되었습니다. 당시 사이버 도박으로 3년간 5천만 원을 탕진했던 아이도 있었고, 지난해 연구를 위해 만났던 아이 중에는 거래 총액이 무려 1억 5천만 원에 이르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사이버 도박을 경험했던 51명 모두 도박의 이유는 ‘돈’이었고, 돈을 딴 아이들 대부분은 명품이나 ‘굿즈’를 구매하는 데 모든 돈을 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2017년에는 소셜미디어에서 “콘서트 티켓을 구매해야 하는 데 돈이 없어요. 대리 입금해주실 분 없을까요?”라는 문장까지 등장했습니다. 아이돌 팬클럽 회원이었던 한 아이가 이 글을 올렸고, 이후 ‘대리 입금’은 ‘수고비’와 ‘지각비’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며 청소년 사이에서 소액대출의 아이콘으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아이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행위가 가능할까 싶지만, 이후 ‘대리 입금’은 소셜미디어에서 ‘댈입’, ‘소액 품앗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며 아이들을 불법 사금융 시장에 끌어들였습니다.

결국, 아이들의 지나친 소비 욕구에서 비롯된 ‘동네 형 대출’과 ‘대리 입금’은 결국 명품과 굿즈를 절실하게 원하는 아이들을 이용하는 신종 대출사기의 실마리가 되었고, 그것이 바로 최근 언론에 공개된 ‘엄마론, 아빠론’입니다. 요즘은 사이버 공간에서 사람을 속이기 매우 쉬운 구조입니다. 특히, 아이들의 비판적 사고가 부족한 것을 고려하면 범죄자들에게 이보다 더 쉬운 돈벌이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디지털 사기 범죄는 마치 변종 바이러스처럼 그 어떤 범죄보다 변이 속도가 빠르고 우리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디지털 사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소비 욕구와 범인들의 현금지원이 짝을 이루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전형적인 대출사기의 본래 목적은 아이의 물질주의 성향을 손쉽게 채워주면서 더불어 부모의 재산을 노리는 데 있습니다. 절차상 문제가 있다거나 너무 쉽게 이루어지는 성공 비율에 대해 아이들은 절대 의심하지 않습니다. 결국, 아이들이 돈을 좇는다는 건 아이들의 소비문화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아이의 소비 욕구가 단순 구매 충동이 아니라 아이 또래에서 소비가 어떤 의미를 차지하는지를 이해하지 않으면 대응하기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마치 ‘양떼효과’처럼 또래 친구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물건을 사들입니다. 그중 ‘굿즈’ 구매는 일상이 된 셈이지요. 아이의 소비는 결국 또래 관계에서 같은 왕관을 쓰느냐 벗느냐의 문제이며, 그래서 100만 원을 호가하는 점퍼와 티셔츠를 구매하기 위해 방구석에서 머리를 싸매고 궁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부모는 아이가 입고 있는 옷이 명품인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못 보던 옷이라서 아이에게 물으면 “친구한테 빌렸어요”라는 대답을 듣고도 더 이상 질문하지 않습니다.

물론 아이들의 ‘씀씀이’가 부모 때와는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당장 아이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만 보더라도 부모 시절 살림 밑천과 맞먹는 고가의 전자제품임에도 요즘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뿐인가요? 지금 아이들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에는 ‘기능을 뛰어넘는 물건들’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아이들에게 노출되는 상업성 콘텐츠와 광고는 부모가 어린 시절 보고 듣던 용량을 훨씬 초과합니다. 다시 말해, 아이들이 참고 버티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뜻입니다.

미국의 유명 심리학자이자 작가인 ‘팀 캐서’ 교수는 자신의 저서 '물질주의의 값비싼 대가'에서 사람들의 가치나 목표가 물질주의를 지향하고 있을 때 삶의 만족도와 행복, 자아실현 수준이 낮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물질주의를 좇는 사람일수록 두통이나 복통, 요통 등 육체적인 증상뿐 아니라 즐거움이나 만족감보다 불안과 슬픔, 분노를 느끼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이는 단지 미국 대학생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후 발표된 수많은 연구자료를 통해 10대 청소년 등 다양한 계층에서도 공통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일상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짜증과 분노가 단지 물리적인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아이의 밑바탕에 내재되어 있는 소비 욕구의 무력감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 의심해야 합니다.

부모가 주목해야 할 것은, 뉴스에 등장하는 억대 대출사기의 정보를 소화하는 것보다는 지금의 아이들이 물질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사회환경을 살피고, 이 상황을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당장이라도 아이에게 광고를 보지 못하게 하고 싶지만, 스마트폰이 아이 손에 있는 이상 뾰족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광고가 화폐가 된 마당에 지금에 와서 아이에게 광고를 보지 말라고 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대신 아이와의 대화를 통해 최근 뉴스를 공유하고 이를 가족끼리 자유롭게 토론하며 문제를 인식해보는 건 어떨까요. 나아가 삶에 있어서 아이에게 ‘명품’과 ‘굿즈’보다 더 좋은 가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부모가 동행해주는 역할이 필요해 보입니다. 어찌 보면, 부모는 아이의 안전을 위해 이제 아이의 소비문화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 나온 김에 오늘 하루는 아이 방을 둘러보면서 아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에 관심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물론 아이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 수준에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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