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1 (목)

  • 구름조금동두천 6.5℃
  • 맑음강릉 4.7℃
  • 맑음서울 7.0℃
  • 맑음대전 7.6℃
  • 맑음대구 9.7℃
  • 맑음울산 6.9℃
  • 맑음광주 9.5℃
  • 맑음부산 8.2℃
  • 맑음고창 6.7℃
  • 맑음제주 9.0℃
  • 맑음강화 4.3℃
  • 맑음보은 8.1℃
  • 맑음금산 7.1℃
  • 맑음강진군 9.1℃
  • 맑음경주시 6.7℃
  • 맑음거제 8.1℃
기상청 제공

오피니언

[전재학 칼럼] "교사는 에피메테우스적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에듀인뉴스] 우리는 역사와 고전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우고 가꾸어 간다. 그래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지혜를 강조한다. 일제 강점기가 아무리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치욕의 역사라 할지라도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각성을 촉구했다. 


지금이야말로 코로나19 사태와 힘겨운 사투를 벌이며 옛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이를 통해 가야 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지혜가 더없이 필요한 때이다. 이를 위해 인간은 근본적으로 늦게 알아차리는 존재란 특성을 잊지 않아야 한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역사적 교훈으로 인간의 특성을 망각하는 순간 비극이 찾아왔던 경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친구의 칼에 찔려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 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인 카이사르(Gaius Caesar: BC100~44)의 삶이 단적인 예(例)다. 


또 “나는 세계의 파괴자다”라는 말을 남긴 미국의 이론 물리학자이자 미국 원자폭탄 제조의 총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John Robert Oppenheimer :1904~1967)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뿐이랴.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과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들이 남긴 공통의 메시지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그렇다. 모두 ‘예측해서 속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날 학교에서 가장 시급하게 가르쳐야 할 것이 무엇일까?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과 사물을 다루는 기능(skill)이 우선적으로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과 나아가 인간이 속한 자연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해 자연의 힘과 소통하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여기엔 사회 시스템과 규율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비판적인 시각과 명료한 지성이 필수적이다. 이는 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발걸음을 배우는 것에서 출발한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미래사회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이것만큼 중요한 역량은 없다. 만약 인류를 멸망시킬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의식을 가진 인공지능이 아니라 소외되고 상처받은 인간이나 자연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래서 기계와의 소통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의 소통을 가르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이반 일리치.(출처=https://lifecuration.tistory.com/275)

바로 여기서 진정한 학교의 역할을 고민하게 된다. 러시아의 작가 이반 일리치의 《학교 없는 사회》를 살펴보자. 그는 교사는 에피메테우스적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매뉴얼이라는 획일적인 절차와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기계적인 알고리즘보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아이들에게 ‘목록과 코드를 깨뜨리는 능력’을 길러주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원적으로 에피메테우스는 ‘뒤에 알아차리는 자’란 뜻이며 프로메테우스의 ‘미리 알아차리는 자’란 의미와 대조를 이룬다. 일리치는 판도라와 결혼한 에피메테우스는 그 자체로 ‘희망’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강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교사는 외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자기만의 잣대로 상황을 예측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아이들의 현재 삶에 필요한 희망을 나누어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반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에서 학교가 아이들의 창의성을 박탈하고 소통하지 못하는 획일적 인간을 길러내는 공간이 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또한 학교 시스템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교육이 이루어지는 사회(Deschooling society)로의 전환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을 바로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이라고 말했다. 


잠시 원문을 인용해 본다. “기대가 아니라 희망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다. … 나는 이처럼 희망찬 형제자매를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자, 다시 우리의 현실을 보자. 과거 어느 시점에 좋았다고 생각했던 일들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좋지 않은 일인 경우가 많다. 또 과거엔 손해 본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보니 그 일이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이처럼 삶의 불확실성을 대처하는 가장 좋은 자세는 무엇일까? 바로 ‘예측’보다는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예측했지만 쇠사슬에 묶여 절벽에 매달리는 삶보다는, 조금 늦게 알아차리더라도 사람들과 소통하며 희망을 줄 수 있는 자유의 삶, 교사는 이런 모습을 닮아야 한다. 


그러나 교사가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회가 교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말인가? 사회가 교사에게 먼저 스승이 되라고 강요하기에 앞서 학생이 자신의 교사를 좋은 스승으로 대우하고 학부모 또한 이를 조장하는 문화가 시급하다.


이렇게 되어야 우리 사회에 스승이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스승이 존재할 수 있는 적합한 배경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는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가 성립하기가 쉽지 않다. 그 내면엔 오늘날 가장 비난의 화살을 받는 교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는 교사를 전적으로 믿고 학생, 학부모와의 만남을 지지하고 기다려줄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는 우리 사회가 그렇게 했고 따라서 스승이 보편적인 존재였다.


이 시대의 교육은 사회의 마지막 보루이고 교사는 그 보루를 지키는 마지막 파수꾼이다. 교사가 아이들에게 단순한 예측만을 말하기보다 진정으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신뢰를 바탕으로 건강해질 수 있다.  


전재학 인천 제물포고 교감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관련기사

93건의 관련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