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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그림책 에세이] 글쓰기로 펼치는 나의 존재잠, 복싱으로 펼치는 그의 존재감 '말라깽이 챔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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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인뉴스] 그림책에 녹아 든 인간의 삶을 어떤 모습일까. 교사 등 교육자의 교육활동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 그림책은 어떤 통찰을 전해줄까. <에듀인뉴스>는 그림책으로 삶을 탐구하는 교사들의 모임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와 함께 그림책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조시온 서울 탑산초 교사/ '좋아서하는그림책연구회' 운영진/ 앵거게임 저자
조시온 서울 탑산초 교사/ '좋아서하는그림책연구회' 운영진/ 앵거게임 저자

“20분 동안 글을 쓴 후 발표할게요!”


강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글쓰기 수업 첫 시간, 현장에서 바로 글을 쓰고 발표하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이 수업을 신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뭐라도 끄적이려는 심산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정신을 모았다. 종이가 바스락거리고 펜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수강생들은 벌써 공책 절반도 넘게 무언가를 끄적이는 것 같았다.


나는 적절한 첫 문장을 고르느라 한참을 망설였다. 고민하는 동안 20분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강사가 발표할 사람을 지명했다. 나는 문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제발 나만 시키지 말라고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한 문단 정도밖에 쓰지 못한 미완성 글을 누군가에게 발표하는 것은, 내 알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부끄러웠다.


다행히 내 이름은 호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안절부절못했던 그 순간만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아, 수업이 끝나자마자 등록센터에서 바로 환불 절차를 밟았다.


그 후로도 몇 차례 글쓰기 수업을 더 수강했다. 글쓰기는 고통스러웠지만, 글은 잘 쓰고 싶었다.


강사들이 들려주는 방법을 열심히 필기했다. 이론 수업은 부담감이 없었지만, 내 글을 발표해야 한다거나 합평을 할 때는 여전히 도망을 갔다.


글쓰기를 배우면 배울수록 내 글을 공개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커져만 갔다. 왜 이리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은지, 도대체 나는 왜 글을 잘 쓰고 싶어서 이 고생을 하는 것인지 자책도 커졌다. 그 행위의 동기를 알아야 내 글을 보여주는 것의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림책 '말라깽이 챔피언' 표지.(레미 쿠르종 저/ 권지현 역/ 씨드북/ 2016)
그림책 '말라깽이 챔피언' 표지.(레미 쿠르종 저/ 권지현 역/ 씨드북/ 2016)

그림책 『말라깽이 챔피언』(레미 쿠르종 지음)을 읽으며, 내가 그동안 글쓰기에 집착한 이유를 발견하였다.


이 책은 말라깽이 소녀, 파블리나가 권투를 배우는 이야기이다.


그녀는 힘센 오빠들 사이에 치여 자란다. 힘겨루기로 청소 당번을 정했고, 집안일은 항상 파블리나의 몫이었다. 그 정글에서 그녀가 숨 쉬는 방식은 피아노를 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오빠들과 맞서기 위해 권투를 배우겠다고 한다. 자기를 침해하는 것들에 정면으로 저항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선 강해져야 했다.


피아노 치던 가녀린 손을 권투 장갑 안에 밀어 넣는다. 억눌림 속에서 자기 존재를 자유롭게 펼치길 위해 권투를 택한다. 제힘으로 제 위치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나에게도 파블리나처럼 ‘권투’ 같은 도구가 있을까? 항상 그런 도구를 갈망했던 것 같다.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 중반, 세상이라는 너른 바다에서 나라는 존재는 미역 같았고 거대한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렸다. 누군가의 대타로 꼬박 1년간을 휴일인 토요일마다 8시간 노동을 한 적도 있었다. 딸랑 교통비 만 원을 받은 채. 그때 나의 시간당 근무수당은 1,250원이었다.


그렇지만 부당한 상황 속에서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리저리 눈치를 봤고 나를 침해하는 것들에 대해 정면 돌파하기 어려웠다. 사회에 납작하게 눌리다 보니 나의 존재는 조금씩 작아져만 갔다.


나에게 가장 간절한 건 내 목소리를 찾는 거였다. 글쓰기가 내 목소리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만 같았다.


때마침 함께 읽었던 『글쓰기의 최전선』(은유 지음)에서 “자기 삶을 설명할 수 없는 언어를 갖지 못할 때 누구나 약자다.”라는 문장에 오랫동안 시선이 머물렀다.


나에게 ‘권투’는 ‘글’이었다. 글은 세상과 부딪힘을 경험하며 나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했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을 나만의 보폭으로 꺼낼 수 있는 안전한 수단이었다. 생각을 붙들고 씨름하며 거기에 맞는 단어와 문장을 고민하다 보면 생각이 훨씬 더 선명해졌다.


20대 후반부터 나는 매일같이 일기를 끄적였다. 나의 존재를 지키기 위한 끊임없는 몸부림이었으리라.


하지만 내 글을 보여주는 것은 여전히 힘들었다. 사람들이 내 글에 내린 ‘해석’과 ‘평가’가 두려웠다.


파블리나는 권투를 배우면서 수없이 맞고 쓰러지며 맷집이 더 강해졌다. 그렇듯이 내 글에 대한 여러 반응을 겪어야 맷집이 키워지고 글이 성숙해질 터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글쓰기란 말하기와 더불어 나를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도구였다. 사람들에게 가닿을 ‘자기 언어’를 지니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글을 보여주고 피드백을 듣는 작업이 필요했다. 때론 내 글을 읽고 누군가가 볼멘소리를 하거나 지적하더라도, 더 사려 깊게 글로 담아내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매번 글쓰기 연습만 했던 나도 파블리나처럼 링 위에 한번 제대로 서보자고 결심했다.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묵혀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캄보디아로 봉사활동을 5번 다녀오면서 차곡차곡 쌓인 내 고민을 그림책 글 원고로 담았다. 가장 편한 친구에게 연락해 1:1로 피드백을 들었다.


친구는 원고를 차근히 읽은 후, “어머, 이런 기발한 생각을 어떻게 한 거야? 난 네 글이 좋은데!”라고 말을 해 주었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비로소 나는 누군가에게 내 글을 보여줄 수 있는 첫 발걸음을 뗐다.


파블리나가 시합을 앞두고 긴장하고 있을 때, 글로브 속에 가족들의 응원이 가득 담긴 종잇조각을 발견한다. 그 응원으로 파블리나는 권투시합에서 승리를 한다. 옆에서 그 존재를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 존재가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


나의 첫 책, 『맨발로 축구를 한 날』(조시온 글, 이덕화 그림)도 친구들의 응원 덕분에 세상에 나왔다. 드디어 글로서 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파블리나는 권투 시합에 승리하고는 권투장갑을 벗어 던진다. “주먹을 활짝 펴서 손가락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게 좋다”며 다시 피아노 앞에 앉는다.


그녀에게 권투는 인생의 목표가 아니었다. 현재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잠시 손가락을 장갑 안에 오므린 것뿐이다.


나 역시 이 세상에서 내 존재의 빛깔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다면야, ‘글’이라는 도구를 벗어던지게 될지 어찌 알리. 하지만 나에게 글은 아직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없는 도구여서, 우선은 글을 붙잡고 늘어져 본다.


끝없는 글쓰기의 고통이여!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 운영진.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는 그림책으로 삶을 탐구하는 교사 모임이다. '아이들 곁에서 교사도 창작하는 삶을 살자'는 철학으로 9명의 교사 운영진이 매주 모여 그림책을 연구한다. 한 달에 한 번 오픈 강연을 통해 새로운 삶의 화두를 던지고, 학교 안팎의 다양한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교류하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 운영진.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는 그림책으로 삶을 탐구하는 교사 모임이다. '아이들 곁에서 교사도 창작하는 삶을 살자'는 철학으로 9명의 교사 운영진이 매주 모여 그림책을 연구한다. 한 달에 한 번 오픈 강연을 통해 새로운 삶의 화두를 던지고, 학교 안팎의 다양한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교류하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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