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1 (목)

  • 맑음동두천 1.8℃
  • 맑음강릉 4.7℃
  • 맑음서울 3.3℃
  • 맑음대전 3.6℃
  • 맑음대구 3.9℃
  • 맑음울산 4.4℃
  • 맑음광주 4.3℃
  • 맑음부산 4.1℃
  • 맑음고창 3.9℃
  • 맑음제주 8.0℃
  • 맑음강화 2.8℃
  • 맑음보은 1.0℃
  • 맑음금산 1.1℃
  • 맑음강진군 4.9℃
  • 맑음경주시 4.2℃
  • 맑음거제 5.2℃
기상청 제공

오피니언

[칼럼] 멘토를 향하여

 

01

나이가 들며 아픈 데가 두 군데 생긴다. 가까운 종합병원을 정하여 진료를 받아온 지가 10년이 넘었다. 한 증상은 순환기내과에서, 다른 한 증상은 내분비내과에서 진료를 받는다. 상태가 나빠지지 않도록 정기검사를 하고, 그에 따른 진료와 약 처방을 받는다. 한 병원에서 두 가지 증상을 같이 진료 받으면 이점이 있다. 두 분 의사선생님이 내 진료정보를 공유하며 나를 살펴준다. 채혈검사도 한 번만 하면, 그 결과를 두 분이 함께 활용한다.

 

그런데 이 두 분 의사선생님이 환자인 나를 대하는 방식은 너무 다르다. 내분비 내과 A 의사선생님은 환자가 자기관리를 잘못하면 호통을 친다. 나이 불문, 신분 불문, 가리지 않고 야단친다. 게으른 환자에게는 나빠질 예후를 말하며, 거침없이 경고한다. 나도 야단을 맞는다. “또, 아무거나 절제 없이 먹고 다녔구나. 밤 9시부터 아침까지는 물 이외에는 먹지 말라고 했잖나!” 나는 진료일이 다가오면, 검사 지표가 걱정되어 음식과 운동 등에 신경을 쓴다. 이럴 때의 나는 그저 야단맞기 싫어하는 초등학생 수준과 별반 다르지 않다. A 의사를 만나는 날, 나는 내 병에 대해서 진지해진다. 또 그런 만큼 한편으로는 약간의 우울을 품는다.

 

그런가 하면, 순환기 내과 B 의사선생님은 얼마나 온화한지 마치 세련된 외교관과 회동하는 분위기이다. 검사결과를 설명하고 주의점을 말해 줄 때도,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고 따뜻하기가 이를 데 없다. 나는 B 의사에게서 두 번이나 시술을 받았다. 나에게 시술을 통고할 때도 그는 온화하고 정중했다. 그는 마치 나를 만찬 자리에나 초대하는 듯한 톤으로 말했고, 나는 그 초대에 홀리듯 시술에 응한다. 원무과에서 시술 예약을 하고, 환자 주의사항을 읽어보고, 서약서를 쓰면서, 아! 이게 나름 심각한 것이네 하고 깨닫는다.

 

10년 넘게 나를 진료한 B 의사는 정년으로 병원을 떠난다. 나를 마지막으로 진료하는 자리에서 그가 내게 질문을 한다. 심혈관 질환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 주의해야 할 점, 세 가지만 말씀해 보실까요. 그가 운을 띄웠다. “첫째는요?” 내가 대답했다. “술을 비롯한 음식의 절제입니다.” “둘째는요?” “적절한 운동입니다.” “셋째는요?” “스트레스 예방입니다.” 그가 나를 부드럽게 응시하더니 말한다. “다 맞는 말씀인데, 제일 중요한 것을 빠뜨리셨습니다.” 내가 대답을 못 하자,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빠뜨리지 않고 약을 챙겨 드시는 겁니다.” 그는 내가 약을 처방대로 잘 먹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마지막 진료에서 나에게 확실한 진료 메시지를 심어주었다. B 의사에게 진료 받는 동안 나는 내 병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진지하게 치료의 의지를 다잡지도 않았다. B 의사의 마지막 메시지마저 없었다면, 나는 좀 맹탕으로 나의 병을 관리할 뻔했다. 그의 부드러움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두 분의 의사선생에게서 보살핌을 받은 셈인데, 한 분에게서는 내 병에 대한 긴장의 필요성을 배우고, 다른 한 분에게서는 내 병에 대한 낙관을 배운 셈이다. 그분들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영향으로 미쳐 왔다. 덕분에 나는 내 병을 대하면서 한쪽 극단의 마음으로 기울지 않고, 그 나름의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분들을 나의 건강 멘토로 볼 수 있다면, 내가 같은 시기에 서로 다른 두 멘토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두 분은 내 마음 안에 들어와서 내 안에서 상호작용을 하였다. 그리하여 내 병에 대해 내가 치우친 마음을 갖지 않도록 이끌어 갔다.

 

02

나는 첫 돌을 좀 지나고서부터 할머니 댁에서 자랐다. 전쟁 뒤끝이라 모든 것이 황폐하고 궁핍한 시절인 데다, 내 밑으로 연년생 동생들이 생기게 되고, 육아 형편이 어려워지자 나를 할머니 댁에 맡긴 것이다. 그때 할머니 댁은 우리 집에서 2백 리나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어쩌다 한번 집으로 올 수조차도 없는 먼 곳, 할머니 댁으로 간 것이다.

 

할아버지는 시골의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셨는데 온유한 성품이셨다. 학교 뒷마당 너른 사택은 언제나 호젓한 나의 놀이터이었다. 내가 맏손주이었으므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끔찍할 정도로 모자람 없는 사랑을 주셨다. 꾸지람이란 것은 아예 없었다. 무슨 짓을 해도, 사랑스럽게 보아주셨다. 조금만 괜찮은 짓을 하면 어마어마한 칭찬이 오래 따라붙었다. 할머니의 사랑은 그 어떤 궁핍도 대적할 수 없었다. 전쟁 후 아이들은 너나없이 배가 볼록 튀어나오는 영양 결핍에 걸려 있었지만, 고기는 먹고 죽으려 해도 구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찰무거리 개구리’를 잡아다 손주에게 고아 먹이기도 했다.

 

나는 그때 할머니 치맛자락의 내음을 지금도 ‘유년의 향수’로 기억한다. 구수하고도 짭조름한 장 내음 같기도 하고, 부엌의 땔나무 연기 내음 같기도 하고, 우물에서 막 길어 온 찬물 향기 같기도 한 그 냄새를 기억한다. 그만큼 내가 할머니 치맛자락에 자주 얼굴을 묻고, 그 치맛자락에 몸을 감싸며 무언가 조르거나 칭얼대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그저 ‘아이고! 내 새끼, 아이고! 내 강아지’하며 도닥거려 주셨다. 할머니의 그 억양이 귓전에 남아 있다. 나에게 지금 남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마도 이때 그 원천이 형성되었으리라. 사랑도 받아 본 사람이 사랑을 줄 줄도 안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여름에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기 때 나가서 소년이 되어 돌아온 셈이다. 잊어버린 어머니의 얼굴, 그 낯설고 어색하고 뻘쭘함이란,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다. 젊은 어머니는 엄격하고도 단정하셨다. 그 어떤 응석도 피울 수 없었다. 떼를 쓰거나 버릇없는 행동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밑으로 두 동생은 정말 낯설었다.

 

할머니 댁에서는 내가 항상 하나밖에 없는 막내로 사랑을 받기만 했는데, 여기서는 이제 맏형 노릇을 해야 한다. 어머니는 바로 이 점을 가장 강조해서 가르치셨다. 네가 잘해야 동생들도 너를 보고 배운다. 무거운 책임감이 나를 눌렀다. 실제로 다음 날부터 어머니에게 자주 꾸중을 들었는데, 꾸중의 내용은, 내 잘못 그 자체보다도, ‘그래서야 동생들이 너에게서 무얼 배우겠느냐’에 있었다. 아무튼 나는 꾸중을 듣기 위해서 어머니에게로 온 것 같았다. 나는 밤마다 할머니를 그리며, 숨죽여 울었다. 나를 어머니에게로 보낸 할머니를 원망하였다.

 

어머니는 여기가 ‘내 집’임을 일러 주셨다. 여기서는 할머니 댁과는 다른 역할이 있음을 알아듣게 설명하셨다. 그간에 너만 위해 주던 데서 생긴 버릇들은 고쳐야 한다고도 했다. 그 엄한 어머니가 환한 표정으로 나를 칭찬한 일이 있었는데, 내가 2㎞ 떨어진 감나무골에 또래들과 가서 감을 따서 집으로 가져왔을 때이었다. 아, 이 집에서도 살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여기는 여기대로 살아가게 하는 그 무엇이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사는 일에 어떤 논리와 질서 같은 게 있음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럴 나이로 접어들고 있기도 했다.

 

03

어머니와 할머니는 내 유·소년기에 독점적이고 절대적인 영향을 준 멘토이다. 한때는 이런 질문을 던져보기도 했다. 지금의 나를 나 되게 하는, 나의 인성에는 할머니에게서 받은 영향이 더 많을까. 어머니에게서 받은 영향이 더 많을까. 분석 틀에 의지하면 무언가 답이 나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무용하다. 지금의 나에게 그 어떤 단독자의 영향이 얼마나 지배적일 수 있을까. 어머니 영향만이었다면 나는 그 어딘가에 갇혀있을 것이다. 할머니 영향만이었다면, 나는 그 어딘가에 멈추어 있을 것이다. 두 분의 영향은 내 안에 들어와서 부단히 상호작용하였다. 그래서 영향력의 상승이 일어나고, 그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리라. 나의 이런 가설은 뉴턴의 다음 구절을 읽음으로써 더욱 미더워졌다.

 

“세상의 사물들은 자기 나름의 신비한 본성을 갖고 있다. 그 사물들이 밖으로 드러내는 고유한 모습(행동양식)은 바로 그 본성에서 비롯하는 것이다”라고 누가 내게 이야기한다면, 나는 그것이 세상에 관한 설명이 전혀 되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 모든 현상에는 두세 가지의 일반원리가 있다. 그 일반원리에서 사물들의 성질과 그것들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비롯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향한 위대한 이해의 첫발을 내디뎠다고 할 수 있다.- 뉴턴(Isaac Newton)의 <광학>에서

 

세상에는 자기의 멘토에 갇히는 사람도 있다. 특정의 멘토만을 너무 절대적으로 따른 데서 오는 딜레마라 할 수 있다. 멘토가 꼭 한 분일 필요는 없다. 여러 멘토를 내 안으로 들여, 그들이 내 안에서 상호작용하도록 지혜를 쌓아 가면 좋겠다. 멘토를 향하는 데에도 열림의 자세가 필요하다. 시대가 그런 시대이기도 하다.

관련기사

93건의 관련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