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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팡교육뉴스] 도대체 ‘정체성’이 뭐기에 자녀를 힘들게 할까요 - 서민수 경찰관의 요즘자녀


1968년에 ‘피그말리온 효과’ 이론이 소개된 이후 모든 연구가 그렇듯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1980년까지 권위 있는 사회과학지에 700회 이상 인용되었다는 점을 볼 때 동의하는 학자들도 꽤 많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면 이 ‘피그말리온 효과’에 대해 모를 수가 없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최근에는 코로나 19로 인해 원격수업이 늘면서 부모의 교육방식에 대한 해법을 ‘피그말리온 효과’ 이론에서 찾기도 합니다. 코로나 덕분에 부모도 이제는 교육자의 역할을 도맡게 되었으니까요.

‘피그말리온 효과’ 이론은 1964년 미국의 교육학자와 교장 출신인 교사가 공동으로 연구한 이론입니다. 두 연구자는 한 초등학교에서 학급 교사에게 무작위로 선발한 아이들의 명단을 보여주며, 이 아이들이 수개월 후 성적이 향상될 아이들이라고 알려줍니다. 그 후 학급 교사는 아이들의 성적이 향상될 거라는 기대를 품고 교육을 했고, 실제 아이들의 성적은 놀랍게 향상되었습니다. “교육자의 기대감이 아이의 성장을 도울 수 있다”라는 게 이 이론의 핵심이죠.

반대로, 비슷한 시기에 연구된 ‘낙인 효과’ 이론은 “아이들의 일탈이 아이의 특성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평가, 즉 낙인으로 만들어진다”라는 이론입니다. 성장기 실수가 잦은 아이들에게 흔히 적용되는 이론 중 하나죠. 이 이론은 “아이의 사소한 행동을 일탈 행위로 낙인찍으면, 이후에 더 심각한 일탈이나 범죄행위를 할 수 있다”라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어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내리는 평가에 대해 더욱 신중해 달라는 요구도 있습니다.

뜬금없이 심리 이론을 들먹이는 이유는 소개하고 싶은 사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저는 한 특목고 1학년 남자아이를 만났습니다. ‘소년미’가 물씬 풍기는 아이였죠. 평소 존경하던 한 교수님이 조카 때문에 형님 내외분이 많이 고민하신다며 상담을 요청하셨습니다. 부모님은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아이가 기숙사에서 밥도 먹지 않고, 자꾸 핑계를 대며 학교를 나오려고 한다. 중학교 때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행동이다. 원격수업 때문에 집에 머물 때는 온종일 게임에 빠져 자기 방에서 잘 나오지도 않는다. 부모와 대화하는 것을 꺼리고 최근에는 대놓고 정신과 치료를 알아봐달라고 해서 고민이 더 커졌다”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저는 아이와 처음 만나 4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지만 그다지 “문제가 있다”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이가 축적한 도덕성이나 개념 원리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높아 보였고, 갓 배운 티가 나는 철학은 저를 매료시키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대화를 할수록 중간중간 부모의 사례가 거론되는 비중이 커지더군요. 특히, 아이는 지난 시절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 지점을 기억하고 있었고, 여전히 검토 중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게다가 아이는 부모가 요구해왔던 바른 생활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었고, 자신에 대한 부모의 평가가 그리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깡마른 체격이나 허름한 옷차림은 현재 아이가 얼마나 무기력한 상태인지를 알기에 충분했죠. 저는 이 사례에서 부모와 아이 사이의 문제가 아닌 아이의 ‘정체성’에 주목했습니다.

보통 아이들의 이상행동을 두고 에릭 에릭슨의 ‘사회심리 발달단계’를 자주 적용합니다. 미국의 발달심리학자인 에릭 에릭슨은 ‘사회심리 발달단계’를 통해 인간의 발달단계를 총 8단계로 구분했죠. 특히, 에릭슨은 8단계 중 5단계인 ‘청소년기’에 아이들이 이전 시기보다 신체적으로나 지적·감성적으로 급격한 성장과 혼돈을 경험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고학년이 될수록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또래 집단에 대한 열정을 쏟게 되는 시기라고 했죠. 이 시기에 만약 아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지 못하면 혼란에 빠져 스스로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기도 합니다. 여기서 ‘정체성’이란, 자신이 학교와 가족 또 사회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정의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부모가 아이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지 않으면, 아이는 자신을 ‘부족한 사람’이라고 받아들인다는 거죠. 대표적으로, 이 시기에 아이들이 정체성 혼란을 겪으면 정상적인 또래 관계를 회피하고, 일상에 무감각하며, 자신을 잘 꾸미지 않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입니다. 특히 도덕성이 강한 아이일수록 간혹 엉뚱한 행동과 과격한 단어를 써서 부모를 놀라게 하죠. 어쩌면 “자신의 상태를 알아달라”는 메시지일 수도 있습니다. 이 아이도 다양하고 복잡한 요인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는 게 분명해 보였고, 부모님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 아이에게 부모님의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부모님이 아이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했습니다. 사실 부모님은 “아이가 처음 만나는 사람과 밥을 먹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 했지만, 그날 아이는 저와 밥을 두 그릇이나 뚝딱 해치웠고, “아이가 처음 만난 사람과는 말을 잘 안 해서 힘들 것”이라고 걱정했지만, 제가 묻지도 않은 동아리 활동과 자신과 친한 친구의 이름까지 거론하며 “다음에는 그 친구도 같이 만났으면 좋겠다”라고 너스레까지 떨었지요. 유쾌하게 함께 셀카도 찍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부모님은 스스로 자녀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고민해야 하고, 아이를 위해 도움이 되어줄 수 있는 더 많은 ‘사람’을 찾아 소개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는 지금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줄 사람이 필요한 셈이거든요.

부모님께는 자녀에 대한 ‘평가’와 ‘기대’를 점검하시고, 아이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모든 부모는 아이에게 큰 기대를 품으며 키웁니다. 그 기대 또한 무한하고 맹목적이죠. 하지만 어느 순간 부모의 기대가 변하는 시점이 찾아옵니다. 대체로 아이의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는 중학교 고학년 시기에 아이의 학교생활과 성적이 부모의 기대에 영향을 미치곤 합니다. 더구나 이 시기에 아이가 부모의 눈 밖에 나는 실수라도 하면 그 행동 하나로 부모의 기대와 평가는 곤두박질치죠. 게다가 아이의 성장과는 무관하게 부모의 성향과 상황에 따라 자녀의 평가와 기대가 조작되곤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이는 달라진 수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비관하고 무기력해지죠. 부모의 노골적인 기대와 평가의 잣대를 일상에서 마주한 아이는 예전처럼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무시한다며 맞서게 됩니다. 맞습니다. 어쩌면 아이는 지금 자신에게 예전에 없던 ‘의견’이 생겼다는 걸 인정해달라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중입니다.

요즘 우리는 평가가 난무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도 타당한 평가가 아닌 잘못된 평가가 판치는 사회에 말이죠. 그래서 사회가 서로 편을 나눠 옴팡지게 싸우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겁니다. 아시다시피 사회 집단에서 기대와 평가는 높은 생산성을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더구나 작은 사회라는 가정에서 부모의 평가와 기대는 자녀가 ‘정체성’을 찾는 데 큰 힘이 되죠. 앞서 우리는 ‘피그말리온 효과’를 통해 아이에 대한 기대감이 아이의 성장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배웠습니다. 또, 앞서 우리는 ‘낙인 효과’를 통해 아이에 대한 ‘잘못된 평가’가 자칫 아이를 더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도 배웠죠. 다른 건 몰라도, 제가 만난 아이들은 부모의 기대와 좋은 평가가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해줬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부모의 기대와 평가는 성장하고 있는 자녀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