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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팡 아트뉴스] 형상 아닌 심상으로 말하다… 서정 이춘환 화백

눈으로 볼 수 없는 감각, 화폭에 담아
선, 면 등 기본 조형 요소로써 단순화해 해석의 여지 극대화
한국 정신성과 현대적 조형 언어 어우러진 대표작 ‘산의 기운’ 등
뉴욕 첼시서 개인전 ‘북한산’ 열어

자신을 내세우는 서양화와는 달리 자고로 동양화의 참맛이라고 하면 겸양과 포용, 중용일 테다. 서양화의 현대적인 외형에 동양화의 미덕과 정신성, 이 두 성질이 공존하는 그림이 있어 눈길을 사로잡는다. 서정 이춘환 화백의 회화는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써 표현되지만, 단순화돼 쉬운 이미지와 마음 넉넉한 여백은 동양화의 그것과 같아 그림을 마주한 이의 근심도 스트레스도 모두 흡수해주듯 편안함과 힐링을 선사한다. 
 

그의 화두는 자연이다. 복잡하고 분란한 세상을 살아내는 현대인에게 위로를 건네는 데 있어 자연만큼 효과적이고 적절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고도화되고 편리해질수록 인간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것에 자꾸 중독되기 마련이다. 오감이 무뎌질 정도로 감각이 오염돼 가는 시대에 이를 회복시키고 다시 일깨워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연인 것이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현대인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휴식이죠. 그래서 저는 자연을 그립니다.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으니까요.”
 

그림을 마주한 감상자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제아무리 강렬하고 그림이더라도 생명 없는 화려한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이춘환의 그림은 선, 면 등 최소한의 기본 조형 요소로 구성돼 일견 단조로워 보일 수 있으나, 흡사 시(詩)와 같아 보는 이의 심상을 그대로 투영하며 그림에 생동감과 생명력이 담긴다. 
 

 
전라남도 완도에서 나고 자란 이 화백은 고향 풍경을 소재 삼아 40년간 수묵화에 매진하며 화업을 이어왔다. 이후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던 때에 정신성을 구현할 수 있으면 재료는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에 과감히 먹을 버리고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을 도입, 이후 20년 가까이 서양화 재료를 비롯한 각종 혼합 매체를 통해 지역 곳곳의 숨겨진 자연경관을 그리는 데 천착해오고 있다. 이렇듯 직접 관찰하고 경험한 산의 모습을 먹의 농담으로 섬세하게 그린 산수화부터 형태를 단순화시킨 반구상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한국의 아름다움, 고유의 정서를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그의 남다른 애정과 무관하지 않다.
 

이에 이춘환은 올해에만 두 번의 개인전을 뉴욕에서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지난 4월에 이어 이달 19일까지 뉴욕 첼시 중심가에서 열리는 개인전 ‘BUKHANSAN’에서는 대한민국의 산이 지닌 웅장함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대대적으로 조망한다. 특히 작업 초·중반기인 수묵화 시기에 해당하는 <범봉운해>(2005)와 대표작 <산의 기운>의 새로운 시리즈, 구상화 대표 연작 <달항아리- 텅 빈 충만> 등 14점이 현대미술의 중심지인 뉴욕에 내걸린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국내는 물론, 해외가 주목하는 이춘환 화백 고유의 조형 언어에 대해 들어봤다. 
 

 
─일찍이 수묵화 작가로 입지를 구축해 지난 40년간 수묵화에 매진해왔으나, 현재는 한국적인 정신성과 정서를 바탕으로, 서양화 재료를 활용해 현대적이고도 다양한 시도를 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산의 기운>은 수묵화에서 서양화로의 변모를 보여주는 첫 작품인데, 변화하게 된 직접적인 촉발의 계기가 있었나.
 

“사회가 발전하고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현대인은 더욱 피곤해져 가더라. 진정한 휴식을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연뿐이라고 늘 믿어왔다. 아울러, 복잡하지 않고 단순해야 보는 이가 피로하지 않으며,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붓을 잡은 이후부터 줄곧 자연을 그려왔지만 세상이 변해감에 따라 더욱 단순화된 자연을 그리고자 했다. 특히 전통적인 정신성을 유지하되 현대적인 조형을 도입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던 중. 늘 해오던 것, 쓰던 것만 고집해서는 새로움을 모색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고, 먹을 벗어나 과감하게 아크릴 물감으로 화폭을 전개하는 도전을 감행했다. 이로써 재료의 한계를 벗어나 다채로운 소재와 이들의 물성, 그리고 강렬한 색감을 통해 비정형적인 감각, 기운 등을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됐다. 
 

다섯 살 때부터 조부로부터 서예와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께서는 그림도 그리셨는데, 이를 보고 따라 그리며 자연스레 그림과 가까워진 것 같다. 지겨운 한문을 배우면서도 틀리면 종아리를 맞는 통에 매 맞지 않으려고 열심히 배웠던 기억이다. 이처럼 어렸을 때 한문과 서예를 익혔던 것이 애초에 수묵화 작업에 매진하게 된 계기가 됐다. 내가 작업 속도가 굉장히 빠른 편인데, 머릿속에서 구상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쏟고 기승전결을 미리 다 세워둔 다음 화면으로 옮긴다. 스케치도 할 필요 없이 일필휘지하듯 신속하고 짧은 시간에 그려낸다. 서예와 동양화에서의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듯하다.”
 

 
─대표작 <산의 기운>은 명제가 말해주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란 느낌을 산의 형상으로써 시각화한 회화다. 이처럼 감각과 심상을 화폭으로 옮기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먼저 내 화업에 있어 큰 영향을 끼친 귀인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20대 초반 무지렁이 작가였던 나의 그림을 알아봐 준 은인이 계시다. 40년 전은 지금처럼 전시장이 흔하던 시절이 아니었고 그나마 다방이 문화예술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때였는데, 나 역시 다방에 그림을 몇 점 걸어놓고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
 

어느 날 노신사 한 분이 오셔서는 그림을 죽 둘러보더니 두 점을 사겠다고 하더라. 그렇게 인연이 돼 그분을 모시고 저녁 식사를 대접한 후 캄캄한 밤바다를 함께 걸었다. 통통배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대뜸 그분이 하는 말씀이 ‘저 소리도 그릴 수 있겠느냐’였다. 지금 같으면 소리를 어떻게 그리느냐며 반문할 테지만, 그때는 패기 넘치는 어린 마음에 ‘화가가 못 그릴 게 어딨겠느냐’며 그려오겠다고 얼렁뚱땅 약속을 해버렸다. 꼭 그려달라며 다시 한번 약속을 확인하던 그분이 서울대 약학대 학장을 지낸 국채호 박사였다.
 

 
그 후, 그림을 배송하러 댁으로 갔는데 입이 떡 벌어졌다. 내로라하는 대가들의 작품이 집안 가득한 거였다. 이런 수작을 소장하는 분이 대체 내 그림에 왜 눈길을 주셨을까 어안이 벙벙했다. 내 질문에 답해주시길,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했다. 주머니 안의 송곳, 즉 내게서 그러한 재능을 보았다며, 그날 밤 바닷가에서의 약속을 꼭 지키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뱉은 말을 온전히 지키기 전까지는 마음이 무거워 찾아뵙기가 어려웠다. 20년이 지난 1999년 동덕미술관에서 개최한 ‘자연의 소리’전(展)에서 비로소 소리를 화폭에 담아낸 작업을 선보일 수 있었다. 그제야 약속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었던 나는 박사님을 찾아뵀지만 애석하게도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아니했다. 영원히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나의 한과 죄스러움은 이후로도 작업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지금도 바람이 불어오는 날이면 바람의 형상을 떠오르게끔 하는 분이다. 결국 그분과의 약속이 <산의 기운>이 탄생하게 된 동인(動因)으로 작용한 것이다.”
 

 
─작가에게 환경은 작업에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미치는 기제다. 실제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산악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산의 기운>도 이러한 배경과 연관이 깊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느 골짜기에 가면 뭐가 있고 어느 산봉우리에 대해 말하라면 당장이라도 줄줄 꿸 만큼 전국 곳곳의 산이란 산은 다 다녔다. 등산을 원체 좋아한다. 특히 새벽 산행을 즐기는데, 자연이 지닌 생명력과 역동성을 화폭에 구현하고 싶었다. 산만큼 자연의 다채로운 색깔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있을까. 계절마다, 시간마다 달리 보이는 것이 산이다. 같은 장소인데도 어찌 이토록 다를 수 있을까 여전히 신기할 정도다. 산에 가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경험하며 젊었을 때부터 등산을 즐겼고 이러한 감상을 보는 이들과 나누고 싶은 뜻에서 작업 소재로 삼게 됐다. 캔버스에 담아낸 산들은 모두 실경(實景)이다. 
 

내 그림을 보면, 시퍼런 산도 있고 새빨간 산도 있다. 혹자는 무슨 산이 저런 색을 띠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산을 다니는 사람이면 단박에 알 것이다. 새벽에 보는 산은 정말 저리 시퍼렇게 생겼고, 가을 단풍이 절정에 오른 산은 저리 불타오르듯 새빨갛더라. 산을 소재로 삼기 전에는 바다를 그렸다. 완도에서 나고 자라 언제나 자연 풍광이 가장 큰 볼거리였고 즐길 거리였다. 자연이야말로 진정한 안식처가 될 수 있음을 경험하고 이를 화면에 구현하기 위해 힘썼다.”
 

 
─생동적인 산세를 단순화한 <산의 기운>은 원색적인 색면으로 구성되는 것이 특징이다. 군더더기 없이 단조롭지만 이 지점에서 ‘기운’이 더욱 극대화되는 것으로 느껴지는데.
 

“전적으로 답사를 통한 실경을 그리는데, 이를 최대한 함축해 핵심만을 남기고자 한다. 최소한의 요소로만 표현해 복잡하지 않고 단조롭게 구성함으로써 보는 이의 피로도를 낮추고 안정감을 주는 데 목적이 있다. 선이나 면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조형 요소를 활용해 산세의 실루엣을 그려내고 이를 과감한 색감으로 채운다. 내 그림은 글이 많고 길이가 긴 소설이라기보단, 단문이지만 볼 때마다 마음에 따라 열린 해석이 가능한 시(詩)인 셈이다.”
 

 
─또 다른 연작 <달항아리-텅 빈 충만>에서는 달항아리와 함께 불상, 전통 문양 등이 병치해 한국 고유의 정신성과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달항아리를 소재로 삼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자연과 더불어 가장 한국적인 것에 대한 고민은 나의 평생 화두였다. 국제아트페어의 수많은 해외 작가들 틈바구니에서 차별화되기 위해서는 다름 아닌 한국적인 아름다움으로 승부수를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줄곧 산을 그려오던 내가 갑자기 달항아리를 그린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달항아리에 대해서 간파하는 것이었다. 경기 광주, 여주, 이천 등에 위치한 도예가들의 작업실을 찾아가 도자에 대해 배우고 제작해보며 점차 백자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갔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달항아리의 형상을 강조하기보다는 이를 받치고 있는 배경에 힘을 줬다. <산의 기운>에서와 같이 달항아리의 형태는 단순화하지만 뒷배경을 강조해 오히려 달항아리의 윤곽을 더욱 살리는 기법을 택한 것이다. 아울러, 안은 텅 비어있지만 풍만한 자태로 그득함을 보여주는 달항아리에 누가 보더라도 단박에 한국의 것임을 알아챌 수 있도록 승무, 반가사유상, 전통 문양 등의 이미지를 병치했다. 달항아리를 내세우는 것이 아닌, 그 주변에 힘을 줌으로써 결국 달항아리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방안을 고안한 것이다.”
 

 
─최근에는 추상 화면의 <빛+결>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흡사 보석 하나하나를 수공으로 박아낸 듯 질감이 도드라진 화면이 이채롭다. 또한 수없이 다양한 색깔이 혼재하지만 이들은 각기 자신을 내세우거나 뽐내지 않고 서로 양보하고 감싸 안는 중용의 정신을 보여주는 듯하다.
 

“내가 직접 경험하고 느낀 총체적 감각을 이미지화한 것으로, 수 없는 점들이 모여 이뤄진다. <빛+결> 시리즈의 모태가 되는 작업은 30년 전 제작된 동명의 수묵화다. 고향 완도의 정도리 구계등은 파도가 칠 때면 파도에 돌이 구르는 소리가 귓가에 왕왕대던 기억이다. 어느 밤이었을까. 여느 때와 같은 돌 구르는 소리와 함께 파도에 달빛이 은색깔로 반사되며 눈부시도록 반짝이던 것을 봤다. 이를 담은 것이 30년 전의 수묵화였다. 여전히 그때의 달빛을 잊지 못한다. 그 기억을 다시 꺼내 추상화로 승화한 것이 <빛+결> 연작이다. 자연 풍경을 아른거리는 빛과 결로 표현하고자 했다.
 

멀리서 보면 단순한 단색화처럼 보일 수 있으나, 가까이 다가서서 바라보면 화면 가득 오색빛깔이 쏟아짐을 알 수 있다. 캔버스 표면에 여린 굴곡과 입체감을 형성하기 위해 다양한 색의 물감을 수직으로 떨어뜨려 알알이 맺히도록 한다. 작은 물감덩이를 한 점 한 점 쌓아내는데, 이를 거듭하면 할수록 마티에르를 살린 입체적인 화면이 완성된다. 수많은 색이 어우러져 은은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모습이 한국적인 아름다움과 궤를 같이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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