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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팡 전시정보] 가장 고요한 순간 번져 드는 여명(黎明)처럼… 이진우의 ‘검은 고요함’

 
인공지능 미술품이 등장하고 증강현실로 작품을 감상하는 오늘날에도 땀과 노동이 수반되지 않는 작업은 이진우에게는 허상이고 공염불일 뿐이다. 머리 없이 오로지 몸으로 작업하는 이진우는 지금껏 지름길도 샛길도 없이, 온몸을 내던져 쇠솔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며 작업을 이어왔다. 잘 닦인 기존의 길을 마다하고 지난 30여 년간 홀로 고유의 길을 개척했다. 예술도 인스턴트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시대에 이진우가 작업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은 여전히 한결같다.
 

 
이진우는 백색 한지와 검은 숯이라는 대조적인 소재를 통해 한국의 정체성을 구현해낸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983년 도불해 1989년까지 파리 8대학과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조형미술학과 미술재료학을 전공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프랑스 미술계를 장악했던 아방가르드, 전위예술에 심취하기도 하며 작가 고유의 내밀한 정체성을 다져가게 된다.
 

특히 회화의 겉모습이 아닌 내면에 천착하기 시작한 그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현하는 데 있어 한지만 한 것이 없다고 판단, 이때부터 한지와 숯을 재료로 삼아 고유의 작업세계를 구축해왔다. 한지와 숯은 한국적인 소재이면서 오랜 외국 생활에도 작가에게 고국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준 매체이기도 했다. 
 

 
한지 위에 잘게 부순 숯 조각을 얹고 그 위에 다시 한지를 겹겹이 발라 쇠솔질하기를 수십 번 반복하는데, 쇠솔을 두드릴수록 숯 조각이 모여 이룬 돌밭의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 이를 통해 단순히 거친 표면을 평평하게 만든다기보다는 궁극적으로는 끊임없이 버려내고 비워내기를 실현한다. 내면의 단단한 자아를 치밀하고 풍부한 질감의 작품은 한지와 숯을 한 겹 한 겹 포개기를 거듭하며 스스로 원하는 이미지를 연출할 때까지 무한대의 과정을 반복하는 인고의 산물인 셈이다. “한지로 덮는 것은 나를 무효화하는 행위다. 하얀 눈으로 세상을 덮듯이 나의 추한 모습, 모자란 것, 부끄러움을 속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덮어낸다.”
 

무목적인 노동 끝에 이진우는 숯과 그 틈새를 뒤덮는 한지의 물성이 이뤄내는 질감을 얻게 된다. 이를 통해 이진우는 자신을 갈아내는 동시에 자신이라는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길 반복하며 자아를 깨닫는다. 이렇게 안팎이 공존하며 동시에 수시로 역할이 서로 바뀌는 과정에서 숯과 한지는 물아일체를 이룬다.
 

“이쯤 하면 됐다 싶을 때일수록 더 긁어내 버린다. 멋있어지면 더더욱 긁어내야 한다는 반항심이 든다. 그렇게 끝없이 계속 작업하다 보면 이러다가 죽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때야 비로소 작품이 나온다.”
 

 
한국에서 2년 만에 작가의 개인전이 마련됐다. ‘Le temps. Vide. L`Espace(시(time). 빈(empty). 들(space))’이란 전시 타이틀은 감상자가 작품과 소통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아무것도 표현되지 않고 비어있는 것, 그리고 그 빈 공간에서 작품에 이입되는 감상자와의 소통 이들 세 가지의 의미를 담아 지어졌다.
 

신작을 다수 포함해 23점이 내걸린 이번 전시에서는 이진우가 빚어낸 고요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흡사 하얀 안갯속과 거대한 어둠의 공간이 공존하는 화면 속 희뿌연 회색빛 여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는 것은 어떨까. 내년 1월 10일까지 서울 창성동 리안갤러리 서울.
 

  • 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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