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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순영의 논술개런티] 폐습을 혁신하며 양성평등으로 나아간 ‘긴즈버그’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자유가 억압됐던 시절, 자유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자유는 생존을 건 투쟁의 대상이자, 인간 존엄의 의미로서의 가치였다. 이토록 자유는 인간에게 절실하고도 중요하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를 위한 투쟁을 해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는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이어져 왔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렇다면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되는 오늘날, 모든 인간은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맛보았을까?

 

미국 여성 해방의 역사를 썼다고 평가받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1933~2020)’는 미국의 대법원 판사다. 긴즈버그는 “어떤 법이든 성별을 근거로 차별하는 것은위헌”이라며 미국 사회에서 여성의 법적 권리를 끌어올렸다. 

 

그녀가 살아온 인생의 순간 속에는 여성 차별이 사회 도처에 만연해 있었다. 긴즈버그가 하버드 법대에 진학했을 당시, 5백여 명이 넘는 신입생 중 단 9명 만이 여성이었다. 당시 법대학장은 여학생들을 초청해 저녁을 함께하며 “굳이 남학생들 자리를 빼앗아 가며 법대에 왔느냐?”는 질문을 했을 정도였다. 

 

이후 남편이 뉴욕에 직장을 잡는 바람에 콜럼비아 법대로 학적을 옮기게 된 긴즈버그는 그곳에서 수석으로 졸업하게 된다.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뉴욕 로펌에 들어갈 수 었었다. 뉴욕 로펌들이 긴즈버그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채용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법조인으로 일할 수 없던 긴즈버그는 결국 로펌 사무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 때문인지 그녀는 “뉴욕 가먼트 디스트릭트에서 일하는 경리와 연방대법관이 다른 점은 뭘까? 한 세대가 차이 난다는 점이다”라며, 이런 시대적 상황을 꼬집기도 했다. 아무리 유능하고 똑똑한 여성이라고 할지라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시대에는 그에 상응하는 자리에 있을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 후 긴즈버그는 럿거스 대학의 법학과 교수직에 임용이 된다. 이때 고용 조건 역시 남성 교수보다 연봉이 적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사회 초년생으로 일했던 1960년까지만 해도 변호사 협회는 여성을 받아주지 않았다. 경찰관, 소방관도 오직 남성만이 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인종차별과 종교차별은 나쁜 것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던 시기였지만, 여성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은 없었다. 

 

긴즈버그는 이런 역경의 시대를 살며, 자신이 살아가는 세대뿐 아니라 자녀의 세대 그 너머에 있는 다음 세대까지를 생각하며 달라진 세상, 새로운 세상을 하나씩 현실로 만들어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전공 분야인 법조계에서부터 차근히 변화를 일궈낸다. 

 

당시 아이다호주에서 유언장 집행인은 여자가 맡을 수 없었다. 다만 조건이 마땅한 남자 후보자가 없을 시에는 여자가 유언장 집행인을 맡을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위헌 여부를 묻는 대법원 항소심에 긴즈버그는 무료로 서면을 작성해준다. 결국, 이 재판을 통해 성별을 근거로 차별하는 법률은 헌법이 수호하는 ‘평등의 원칙’에 위배 된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이후 미국에서는 여성 또한 법 앞에 평등하게 보호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바탕으로, 여성을 차별하는 모든 법률 조항은 위헌이 됐다. 이 일로 인해 긴즈버그는 미국 여성의 법적 권리의 분기점을 세웠다. 그녀를 기준으로 여성 법적 권리의 전후가 나뉜 것이다.

 

그녀는 여성뿐만이 아닌 남성의 역차별에도 발 벗고 나섰다. 1970년대 미국은 남편이 사망했을 때, 아내가 남편의 사회연금을 사회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내가 사망했을 시 남편은 아내의 사회연금을 상속받을 수는 없었다. 긴즈버그는 이에 대해 법 앞에 남성이 평등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 위헌을 주장했고, 미국의 연금법 또한 개선했다. 

 

그녀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관계없이 어느 한 성(性)이 다른 성(性)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모든 것들을 철폐해 나가는 데 힘을 썼다. 그녀가 생각하는 ‘여성 해방 운동’은 여성이 남성과 맞서 싸우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여성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당위적인 인권을 요구하는 ‘인간 해방 운동’이었다. 

 

이후 긴즈버그는 워싱턴 DC 항소법원 판사를 거쳐 클린턴 정부 때 대법관에 임명된다. 그녀는 남녀평등을 위해 6번이나 변론하고, 미국의 헌법이 모든 인간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약속을 지키도록 힘을 썼다. 

 

자신을 가능성과 능력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 속에 사회 첫발을 내딛고, 결국 여성으로서 오르지 못할 자리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 긴즈버그. 그녀는 “가장 위대한 반대 의견이 결국 법원의 의견이 되고 시간이 지나서는 지배적인 의견이 된다”라며 시대를 통찰하는 지혜로 그녀만의 업적을 남기고 갔다. 이것이 시대가 흘러가도 지켜나가야 할 긴즈버그의 유산이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내용으로 해방의 역사를 써 내려야 갈지 그녀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떠올릴 볼 필요가 있다.

 

* 생각해 볼 문제 *

 

1.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남녀불평등의 요소를 떠올려보고 성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방안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생각해보자

2. 긴즈버그를 미국 남녀평등의 아이콘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3. 사회가 자신의 가능성을 믿지 못하고 기회는 주지 않는 등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동될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생각해서 서술하시오

4. 나는 어떤 것에 관한 해방의 역사를 쓸 것인지 생각해보자

 

[이순영의 논술개런티] 폐습을 혁신하며 양성평등으로 나아간 ‘긴즈버그’
 
출처 : 조선에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