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언어는 열린 결말… 그러니 원초적으로 감상하길”

‘언어 예술가’ 게리 힐
아시아 최대 규모 개인전 ‘찰나의 흔적’
영상과 텍스트 활용한 설치 작품 선봬
1980년대부터 2019년 최신작까지 작업 일대기 총망라
2020년 3월 8일까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언어는 고정된 개념이 아니며,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영역을 벗어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언어는 열린 결말인 셈이다. 그러니 언어에 얽매이지 말고 내 작품에서 그저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느낌을 받아 가길 바란다.”
 
인간을 규정하는 핵심요소인 언어와 신체 그리고 인간이 바라보는 이미지와 인간이 속해있는 공간의 형태 등을 주제로 다양한 매체 실험을 지속해온 게리 힐(Gary Hill·68), 그는 ‘언어 예술가’다. 그의 작품에서 이미지와 언어 그리고 소리는 시간에 따라 결합, 분리, 소멸과 탄생을 반복하는 양상을 띤다. 작품 안에서 이미지와 언어가 미끄러지는 찰나에 다른 이미지와 언어가 짝을 이루며 그 뒤를 잇는데, 그 찰나에 소멸된 이미지와 언어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닌, 어떤 장소나 가상의 공간을 점유하며 새로운 의미와 결합하고 확장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게리 힐을 장르로 구분한다면 단순히 ‘비디오 아티스트’가 아닌, 열린 해석이 가능한 ‘언어 예술가’로 분류하는 이유다.
 
작가는 1970년대 초부터 소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영상과 텍스트를 활용한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 1992년과 2017년 카셀 도큐멘타에 참가하고 1997년에는 영상과 설치미술로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받는 등 언어와 신체를 주요 테마로 삼은 작품으로 국제 예술계에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대표작 <벽면 작품>(2000)은 자신의 몸을 반복적으로 벽에 내던지며 단어 하나하나를 힘들여 말하는 남자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작품은 완벽하게 어두운 공간의 벽에 투사된다. 촬영 도중 극도로 강한 스트로브 조명의 단 한 번의 번쩍임이 몸이 닿는 순간을 포착하는데, 이 조명은 영상의 유일한 광원이다. 단일한 순간들이 편집을 거쳐 벽을 배경으로 다양한 자세를 취하는 몸의 장면들과 선형적 텍스트를 연결했다. 또 다른 대표작 <원초적 말하기>(1981~1983)에서는 동일한 캐비닛 둘을 약 1.83m 간격을 두고 서로 마주 보게 설치해서 가운데 복도를 만들었다. 각각의 캐비닛에는 캐비닛의 표면과 수평으로 평평하게 설치된 모니터 네 개와 스피커 한 개가 들어있다. 이미지와 색면들은 관용적 표현들로 구성된 음성 텍스트의 리듬에 맞춰 모니터 사이를 넘나든다. 어느 순간 두 캐비닛의 모니터들은 이미지 하나와 색면 새 개를 보여준다. 이 주기는 맞은 편 가벽에서 나오는 음성 텍스트 문구의 리듬에 따라 네 개의 모니터에 교대로 반복된다. 이 작품은 운율 같은 관용적인 노랫가락으로 구획된다. 그동안 이미지들과 색들이 초기 위치, 즉 한 이미지와 반전 이미지가 서로 마주하고 색들과 그 반대색들이 마주하는 위치로 재설정된다. 이 시간 동안 이미지와 색들은 “노래”의 길이만큼 상호 관계를 유지하며 복도를 따라 흩어진다.
 
<잘린 파이프>(1992)는 두 개의 알루미늄 파이프가 약 25㎝ 간격으로 바닥에 일렬로 놓여있다. 한 개의 파이프에는 흑백 모니터가, 다른 파이프 반대쪽 양 끝에는 스피커가 설치돼 있다. 이를 통해 영상과 함께 들려오는 말소리는 마치 파이프를 통과해 보이는 스피커로 나오는 느낌을 주고 스피커를 만지고 조작하기 위해 표면을 누르는 손의 영상이 두 파이프 사이의 틈을 건너 스피커 표면에 투사된다. 잘린 파이프는 몸으로 연결되는 소리와 이미지의 관계에 대한 은유적 단면이 돼 스피커와 오브제의 이미지를 오브제 그 자체와 자기 성찰적 텍스트를 읽는 소리에 투사하는 것을 통해 강조되며 오브제와 스피커의 표면에 가해지는 손의 물질적인 조작과 상호작용한다.
 



 
4인치 흑백 모니터와 렌즈가 설치된 일곱 개 원통형의 튜브들로 구성된 <나는 그것이 타자의 빛 안에 있는 이미지임을 믿는다>(1991~1992)는 책 무더기 위로 천장에 매달린 튜브가 각각 다른 높이로 내려와 있는 형태다. 이미지들은 크기가 각각 다른 책 크기들에 맞춰져 있으며 두 개의 얼굴, 두 개의 몸통, 두 개의 몸, 입, 손가락, 텍스트, 손들 그리고 의자 하나로 구성된다. 비디오가 비추는 텍스트들은 모두 모리스 블랑쇼의 ‘최후의 인간’에서 가져온 발췌문으로, 책장 가장자리에서 불쑥 끝나버리든가 제본된 부분에서 사라진다. 움직이는 몸과 중첩된 이미지들은 형식적인 공간과 책으로 만든 구조물을 활용한다. 중간에 커다란 손들이 의도적으로 천천히 움직이면서 지워내는 동작을 하고 관람객이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소리인 표면을 문지르는 둔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게리 힐의 아시아 최대 규모 개인전 ‘찰나의 흔적(Momentombs)’이 마련됐다. 영문 타이틀 ‘모멘툼스’는 Moment(찰나), Momentum(가속도), Tomb(무덤)의 합성어다. 지난 50년 가까운 작업 일대에 걸친 사유의 결과물을 통해 열린 상태로서의 언어와 이미지, 신체와 테크놀로지, 가상과 실재공간에 대해 고찰하는 대표 작품 20여 점을 내걸었다. 특정 매체나 틀에 갇힌 예술가가 아닌 동시대 현대미술의 정신을 대변하는 그만의 작업세계를 조망할 수 있다. 내년 3월 8일까지 경기도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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