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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재학 칼럼] 편협한 가치와 매너리즘, 교사가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영화 죽은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

[에듀인뉴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와 <위플래쉬>를 기억해 보자. 각자 키팅 선생과 플래처 교수와 같은 걸출한 주인공의 삶이 드러난다. 만약 우리 학교 현장의 선생님들에게 양자 중에 어느 쪽을 선호하는가를 묻는다면 어떨까? 


물론 이것은 교사가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자신의 가치관을 어떻게 실행할까, 하는 문제와 연계된다. 교육은 양자의 가치관이 융합적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어느 쪽이 우선이라고 일방적으로 단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 특히 학부모는 대부분 키팅 선생이 아니라 플래처 교수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는 우리의 교육이 편협한 가치에만 몰입하여 교실에서 아이들의 삶을 다양하게 기르려는 교사의 소신이 환영받을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음을 의미한다. 여기엔 우리의 교육을 하나의 가치, 상급학교 입시가 압도적으로 지배하도록 만드는 제도적인 문제가 크다. 


설상가상으로 그 속에서 오랫동안 생사를 걸다시피 적응해온 교사들의 매너리즘 또한 동반 작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사가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영화 위플래쉬의 플래처 교수

먼저 우리의 현재 학교 실태를 살펴보자. 우리의 학교는 삶을 기르는 교육이 되지 못하고 점수를 기르는 교육이 반복되고 있다. 교육은 삶의 현장에서 멀어져 있으며, 대부분의 교육이 실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이들의 교육에서 노작(勞作)이 사라지고 있다. 


즉, 삶이 녹아 있는 현장에서 다양한 체험과 노동을 통한 성취 교육을 하지 못하고 닫힌 교실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과 영상으로 지식만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렇게 교육은 현장에서 멀어져 실내화(室內化)되어 있다.


철학자 김영민은 《자본과 영혼》에서 실내화의 핵심이 배제와 조작에 있다고 주장하며 자연이라는 외부에 있는 것을 모조리 실내로 가져오려는 병폐인 실내화 현상을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된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삶에서 시작하는 교육이 아니라, 말에서 시작하는 교육이다. 지금 교육은 글이 말을 지배하고 말이 삶을 지배하는 격이다. 여기엔 인위적인 조작만이 성행할 뿐이다. 


오늘날 교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아이들에게 꾸며진 것과 만들어진 말들만 가르치고 있다. 즉 실제 세상에서 땀 냄새 나는 수업을 하지 못하고 있다. 모형과 교재로 채워진 삭막한 교실에서 꾸며진 것과 씨름을 할 뿐이다. 이런 환경에서 교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렇다. 바로 매너리즘(Mannerism)이다. 이것이 모든 가치를 실내적 가치로 조작함은 물론 공간적으로도 교사를 감금하여 피곤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따라서 여기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열정과 선을 긋는 것이란 의식이 팽배하다. 즉, 어느 것에도 열정과 새로움을 느끼지 않고 적당히 처리하면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환경이 교사에게 매너리즘이란 바이러스를 확산시키는 강력한 숙주이기도 하다. 


하지만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런 매너리즘을 강요하는 것은 사회와 학교라는 시스템이지만, 이것을 지속하는 것은 교사 본인의 선택이다. 매너리즘은 원래 본인도 모르게 찾아온다. 그래서 그 시간을 겪지 않는 교사는 거의 없다. 


문제는 자신이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인지한다고 해도 거기에 안주하는 교사가 많다. 이래서 매너리즘은 어쩔 수 없는 수동적인 현상이 아니라 좀 더 편안함과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선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필자 또한 한때 매너리즘에 빠져 익숙함에 취해 지내다가 이를 인지하는 순간 교사로서의 정체감을 상실해 가던 모습에 교육자적 양심으로 괴롭던 기억이 난다. 이는 필자의 교육적 가치관이나 개인적 철학에 위배 되는 것이었기에 더 늦기 전에 경로를 회귀할 수 있었다. 그때 비로소 매너리즘이란 일종의 가치가 빈곤해짐에 따라서 발생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지만 몸과 마음으로 저항하며 탈출구를 찾고자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예전의 교사의 삶보다 더 넓고 더 깊게 독서에 몰입하는 새로운 습관을 얻게 되었다. 이로써 비로소 세상의 다양한 인물들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배우며 필자의 내면을 성찰하고 사유하면서 어두운 의식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또한 새로운 삶의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비로소 “경험은 최고의 스승”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독서라는 간접 경험의 힘이었다. 결국 매너리즘은 가치의 빈곤함을 이르는 또 다른 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매너리즘에 빠지면 누구나 풍부한 감정과 다양한 가치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같은 것의 반복이 주는 단조로움과 정체만이 남게 된다. 


(출처=https://feature-life.tistory.com/18)

따라서 교사는 현실과 타협하기 위해서 안정감이라는 하나의 가치에만 몰입하지 말고 자신을 둘러싼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을 가지며 일상의 반복에서 열정과 새로움을 추구하려는 의식이 필요하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차이와 반복》에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을 반복하라”고 주문한다. 그는 반복이란 개념을 ‘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란 통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이것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복의 비결이다. 예컨대 피아니스트가 어떤 곡을 천 번 연습해도 이전에 했던 연주를 똑같이 반복할 수 없다. 조금씩 차이 나는 반복을 통해서 결국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흐르는 강물에 매번 발을 담가도 같은 물은 결코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교사가 매너리즘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이미 답은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다. 차이를 만드는 반복으로 생각을 적극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새로운 일을 시도한다고 해서 완전히 새로움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일상의 반복을 통해서 진정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이것은 교육 현장에서의 불편함에 대한 교사 자신의 비판과 사색, 그리고 배움에의 의지를 품은 학생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스스로 자신의 품격을 높이고 유의미한 가치를 만들어 가는 일상의 혁명을 의미한다. 이렇게 교사는 일상의 반복에서 오는 안락함과 매너리즘을 깨부수고 미래세대를 키우는 보람과 기쁨으로 무장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입시 위주의 절망적인 경쟁교육을 극복하고 일상적인 삶의 현장과 연계하는 창의적 교육을 모색하자. 이것은 지금까지의 관성적인 교육과 차별화를 실행하는 작은 혁명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사는 혁명가의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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