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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수 경찰관의 요즘 자녀學] 신학기 부모가 꼭 알아야 할 학교폭력 : ① 집요한 '따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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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하는 아이의 입장에서 ‘따돌림’은 “예상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악마’를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이유도 모른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아이에게 이보다 더 솔직한 직설법이 있을까 싶습니다. 학교와 사회가 ‘교육’이라는 거시적 명분을 내세워 학창 시절에 누구나 흔히 겪을 수 있는 ‘통과의례’로만 치부하는 것을 따끔하게 지적하는 듯도 하고요.

1970년대 일본에서 시작된 ‘이지메(いじめ)’는 1990년대 대한민국에 ‘일진’이라는 사회용어를 등장시켰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러한 ‘일진’의 존재를 외면하고 있던 사이, 다시 ‘왕따’라는 신조어가 등장했지요. 당시 ‘따돌림’은 10대의 심각한 학교폭력이면서 지금까지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사회문제입니다.

그래서 『학교폭력 시리즈』 중 ‘따돌림’을 첫 번째로 선택한 이유 또한 2012년 ‘학교폭력 실태 조사’가 실시된 이래, 피해 발생의 증가 폭이 가장 큰 유형이 ‘따돌림’이고, 현재도 ‘언어폭력’ 다음으로 많은 수치를 차지하는 데다 피해 정도가 가장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돌림’에는 따돌리는 아이들이 보여주는 일종의 ‘신호’와 ‘행동’이 존재합니다. 눈짓, 몸짓, 위치선정 그리고 꾸며낸 말들이 대표적인 행동자료죠. 여기에 갖은 속임수는 물론 협박과 폭력을 넘어 최근에는 사이버 공간에서 드러내놓고 시비를 걸며 흠집 내는 일명 ‘플레이밍(Flaming)’과 ‘가십(Gossip)’까지 추가되었습니다.

일단, 이유가 있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라면 예측이라도 한다지만 ‘따돌림’은 순간의 예측마저 용납하지 않을뿐더러 이유조차 명확하지 않아 당하는 입장에서는 참 괴롭습니다. 특히,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의 정신은 “깨어있는 시간 전체가 마비되는 이른바 ‘코마(Coma)’ 상태”로 비유되기까지 합니다. 결국, 불완전한 의식 속에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가냘픈 마음 한구석에 방 한 칸을 만들고 꾸역꾸역 재워두기 바쁩니다.

특히, 따돌리는 아이들은 교묘하게도 상대 아이의 독무대를 기다렸다가 때를 놓치지 않고 쑥덕거리고, 놀리고, 욕하고, 소문내고, 괴롭히는 것을 은밀하게 반복합니다. 그러고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당사자의 일그러진 얼굴을 감상하며 품평까지 하죠. 게다가 문제가 생겼을 때는 하나같이 “장난이었어요.”라는 말을 내뱉습니다. ‘잘못됐다’라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하고, 그야말로 아이의 영혼을 파괴하는 잔인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돌림’ 피해의 핵심은 ‘외로움’에 있습니다. 실제로 따돌림을 당한 아이들은 한결같이 ‘혼자 있는 나’를 죽기보다 싫어했고, 누군가와 소곤거리며 마음을 나눌 육체적 존재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괴로워했습니다. 다시 말해, ‘외로움’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아이에게 ‘사람’과 ‘장소’ 그리고 ‘환대’마저 송두리째 빼앗아 가는 ‘고립 상태’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따돌리는 아이들은 주로 ‘관계 끊기’라는 공격 수단을 씁니다. 특히,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의 우정 관계를 끊어버리는 공격 특성은 집단적이고 매우 교묘할 정도입니다. 목표로 삼은 아이의 우정 관계를 파악하고, 그 친구에게 접근하여 이간질하고, 속이며, 마치 배신을 당한 것처럼 스토리를 제공하고는 다시 위로해주며 자기편으로 끌어들입니다.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아이들의 ‘동맹’은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따돌림’의 해법은 ‘친구 관계’를 회복시켜주거나 아니면 새로운 ‘친구 관계’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물론 ‘따돌림’에 있어서 가장 큰 희망은 바로 교사입니다. 특히, 담임교사는 교실에서 직접적인 개입이 가능하고, 공격의 단절을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서 ‘따돌림’ 문제에 관심을 쏟고, 해결책을 찾는다면 효과가 발휘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합니다. 하지만 교사가 부담해야 할 교육행정이 만만치 않아 아쉽습니다.

부모의 역할은 더 중요합니다. 특히,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를 둔 부모라면 무엇보다 ‘연민’과 ‘환대’라는 두 단어를 꼭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소 철학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지금껏 전문가들이 제시했던 ‘공감’과 ‘경청’으로는 부모를 움직일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필자의 의지입니다.

‘연민’은 아이의 고통을 부모의 고통과 동일시하는 마음이고, ‘환대’는 아이의 고민을 언제든지 환영하고, 응대하겠다는 열린 태도를 말합니다. 결국, 부모에게 오기까지 외로움으로 고통받고 환영받지 못했을 자녀에게 ‘연민’과 ‘환대’는 효과적이면서도 실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일부 전문가들은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가 특정되어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소심하거나 체격이 왜소하거나 뚱뚱하거나, 친구 관계가 무능할 경우 ‘따돌림’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지만, 저는 이 또한 경계선을 긋는 편견이어서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완벽한 사실은 ‘따돌림’은 아이를 구분하지 않으며, 누구라도 그들의 마음에 거슬리면 은밀한 공격은 언제든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학창 시절 1년 넘게 ‘따돌림’을 당했던 한 여자아이는 ‘인터뷰’를 통해 ‘따돌림’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을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잘못 없다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잘못한 거 없고, 지금까지 잘 버텼으니까 힘내고, 털고, 일어나서 떳떳하게 살아가라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울어도 괜찮고, 짜증 내도 괜찮고, 화내도 괜찮으니까 잘 이겨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인터뷰 마지막에 부모의 태도에 대해서도 조심스레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부모님께 울면서 얘기했어요. 처음에는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이야기를 해주셔서 맞는 말인 걸 알면서도 부모님이 좀 미웠지만, 이어서 따돌린 행위에 대해 같이 화를 내주고, 또 어려운 얘기를 꺼내주어서 정말 고맙다는 부모님의 말씀이 큰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결국, ‘따돌림’을 당했던 아이들은 하나같이 ‘따돌림’에 대하여 상처가 잘 아물지 않는 지긋지긋한 ‘학교폭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학교와 부모님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따돌림’을 당하면 모두가 아무렇지 않은 척 티를 내지 않을 뿐이지, 사실은 오랫동안 남아 있는 ‘통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그런데 왜 어른들은 모를까요?”라고 반문해 적잖이 난처하기도 했습니다.

어찌 보면, 오랜 시간 동안 ‘따돌림’이 존재할 수 있었던 건, 우리 어른들의 ‘오만’과 ‘편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난처했던 아이의 질문에 대한 해답은, 제 몫이라기보다 우리 사회와 학교 그리고 ‘부모’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풀어나가야 할 숙제가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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