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3 (수)

  • 맑음동두천 3.0℃
  • 맑음강릉 0.4℃
  • 맑음서울 4.5℃
  • 구름조금대전 5.5℃
  • 맑음대구 4.2℃
  • 맑음울산 4.1℃
  • 맑음광주 4.1℃
  • 맑음부산 5.0℃
  • 맑음고창 1.2℃
  • 맑음제주 6.9℃
  • 맑음강화 4.9℃
  • 맑음보은 1.5℃
  • 맑음금산 2.6℃
  • 맑음강진군 2.4℃
  • 맑음경주시 1.3℃
  • 구름조금거제 6.4℃
기상청 제공

오피니언

명전략가 제갈량, 1,800년이 지나도 사랑받는 이유

난세에서 배우다,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비우다

    ▲ 삼국지연의도 중 ‘삼고초려’의 일부. 제갈량이 지도를 가리키며 ‘천하삼분지계’를 설명하고 있다. [출처=조선만화박물관]


반란군 장수 앞에서 불교를 강론하다
열다섯 소년은 이미 난세가 본격화하고 있던 중국의 후한 말, 무서운 술수와 무자비한 처형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던 지역 반란군 장수 착융 앞에 섰다. 서기 196년 무렵이었다. 착융은 수행하는 중처럼 가장한 채 형주 예장 부근의 전장지역에 남아 있다가 잡힌 소년을 희생양으로 삼을 참이었다.
 

  
▲ 오귀환 콘텐츠큐레이터

자신의 지도력을 의심한 채 동요의 기미를 보이는 불교도를 중심으로 한 주변 사람들에게 공포에 기반한 자신의 힘을 더욱 과시하기 위해서다. 이미 그는 얼마 전 자신의 편으로 여겨지던 중간급 지도자의 목을 보란 듯이 벤 바 있었다.

그는 부하 장수들이 책상다리를 한 채 둘러싼 진중 가운데 소년을 세웠다. 그 앞에는 자신의 칼까지 빼어내 꽂았다.

"자, (네가 읽었다는 불교에 대해) 강론해 보아라!"

이런 분위기에서 보통 소년이라면 비명을 지르거나 공포에 질려 오줌을 지려도 모자랄 판이었다. 소년은 그러나 곧 무릎 떨리는 공포를 이겨낸 듯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 눈으로 보고 있는 모든 존재는 사실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는 공, 즉 비어 있는 것입니다…."

"뭐라? 보이는 게 모두 비어 있는 거다?... 오, 그렇지! 너도 실체가 없는 거다. 네 목부터 실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주마!"

아이의 눈으로 난세의 현장을 목격하다

제갈량은 서기 181년 황허와 양쯔강 사이의 큰 강인 회허 유역을 중심으로 펼쳐진 평야지대 서주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낭야에 터를 둔 제갈 가문은 그러나 난세의 시작 직후 아버지 제갈규가 죽고 유학에 정통한 엘리트였던 작은아버지 제갈현을 중심으로 격동의 세월을 헤쳐 나가야 했다.

제갈량은 3남1녀의 자녀 가운데 차남이자 세 번째 자식이었다. 형인 제갈근이 홀로 된 후처 어머니를 모시며 서주 낭야의 본가에 남고, 제갈량과 누나 영, 동생 균은 작은아버지를 따라 내륙의 양쯔강 중류를 근거지로 한 형주로 이주해야 했다.

제갈현은 형주를 다스리던 제후이자 황족인 유표가 신임하는 유학엘리트로서 형주의 예장태수로 내정돼 있었다. 서주로부터 형주로 이동하면서 10대 초반의 제갈량은 충격적인 난세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목격한다.


  
▲ 각자장 철재 오옥진이 새긴 출사표 편액. 출사표는 제갈량이 위 토벌을 위한 출진 때, 촉제(蜀帝) 유선에게 바친 글이다. [출처=e뮤지엄]

할아버지가 실력가 환관의 양자로 들어가 명문가의 반열에 오른(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환관의 양자 후손이라고 주변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멸시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을 느끼며 살아야 했던) 무서운 야심가 조조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며 서주지역에서 벌인 대학살과 약탈, 파괴의 현장을 보게 된 것이다.

조조군이 서주를 쳐부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참상의 흔적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난을 피해서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이 짓고 살던 판잣집은 모조리 불탄 채로 버려져 있었고, 곳곳마다 죽은 사람들의 뼈가 나뒹굴었다. 당시의 참상은 이렇게 기록돼 있다.

"서주로 난입한 조조군은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수십만의 남녀가 죽임을 당하고 강물에 던져졌다. 물이 막혀 강조차 흐르지 못 했다… 닭과 개도 그 씨가 말랐다."


당시는 무능한 황제를 대신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황제의 외척과 환관이 서로 속고 속이고,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궁정 암투에 따라 황제의 중앙권력이 급격히 무너져 내리면서 지역마다 제후들이 힘으로 천하의 패권을 도모하던 시기였다.

조정은 조정대로, 제후들은 제후들대로 서로 끊임없이 벌이는 살육극에 절망한 엘리트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후학을 양성하거나 세상을 한탄하거나 훗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가 피를 부르는 난세 앞에서 과연 학문은, 교육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1800여 년 전 중국 대륙의 한가운데서 10대의 제갈량이 바로 그 물음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원래 한나라 사회는 유학을 바탕으로 고전을 공부하는 분위기가 매우 강했다.

적어도 전한 초부터 후한 중기 이후까지 350여 년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수도인 장안과 낙양의 국립대학인 태학을 비롯해 각 지역 대도시들의 교육기관에선 사실상의 국교인 유학을 바탕으로 국가 엘리트를 집중적으로 양성해 왔다. 유학자 동중서의 건의에 따라 예와 덕을 중요시하는 유교를 사실상 '국교'로 삼은 것이다.

태학에서는 <주역> <서경> <시경> <예기> <춘추>를 필수과목으로 박사들이 학생들을 가르쳤다. 서민들도 저마다 <효경> <논어> 같은 것을 읽으려 할 정도로 유학의 위력은 막강했다.

누구든 관료가 되려면 '유학을 공부한 자'라든지 '유교 도덕의 실천자'가 돼야만 했다. 유학을 바탕으로 '경세제민'(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한다)의 가치관을 정립한 엘리트라야 대접받는 지도층에 오를 수 있었다.

삼국지로 유명한 영웅이나 지도자들 역시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양쯔강 이남 강동태수 손견의 아들로 나중에 오나라의 지도자가 된 손권도 어린 시절부터 <시경> <서경> <예기> <좌전> <국어>를 독파한 영명한 소년으로 이름을 떨쳤다.

난세에서 배운 뒤, 천하 구할 이론을 세우다
착융의 칼날 앞에 섰던 제갈량은 그 순간 착융의 부하장수들이 반란을 일으켜 극적으로 목숨을 구한 것으로 설화는 전한다. 이 이야기대로 제갈량이 구사일생을 한 것이 사실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 삼국지연의도 병풍 [출처=국립고궁박물관]

다만 착융이 부하장수들의 반란에 의해 예장 부근에서 살해되고, 그 부하장수들이 투항한 유표 쪽의 예장태수 제갈현의 군대도 나중에 더 큰 적대세력에 밀려 그곳에서 쫓겨나 천신만고 끝에 형주로 후퇴한 것은 모두 역사적으로 사실이다.

이처럼 제갈량은 이미 10대 초부터 전쟁과 죽음, 약육강식과 파괴, 평화의 소중함 등을 가슴 깊이 생생하게 배워나가고 있었다. 학문을 익힌 뒤 그 학문을 바탕으로 나중에 천하를 논하거나 다스리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례와 다르게, 거꾸로 무시무시해져만 가는 현실을 먼저 적나라하게 배운 뒤 그 무시무시한 현실의 무게에 눌린 채 뭔가 천하를 구할 이론을 찾고 새로 세워야 했던 것이다.

소년 시대 그의 아버지격이자 소중한 멘토였던 작은 아버지 제갈현은 전쟁에서 겪은 고초로 건강을 크게 상한 뒤 머지않아 세상을 뜨면서 사랑하는 조카 제갈량에게 귀한 가르침을 남긴다.

"형주의 초야에 묻혀 사는 훌륭한 명사인 수경선생 사마휘를 찾아가 스승으로 삼고 배우라."

자칫 눈앞에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실의 절실함 때문에 어쩌면 급해질 수 있는 조카에게, 보다 근본적이고 큰 눈을 가지고 나아가라고 당부한 것이다.

그걸 해줄 수 있는 훌륭한 스승이 바로 머지않은 곳에 있다는 것이다. 10대 가장이 된 제갈량은 양양성 밖 융중에 거처를 마련하고 동생 균과 함께 농사를 지어 자립기반을 마련해나가면서 배움에 매진한다.
 

  
▲ 강릉영동대학교 입학처 http://goo.gl/nHJN6o


제갈량이 특별한 이유
이런 절절한 현실 경험 속에서 배움과 학문의 방향을 스스로 정립할 수 있었던 제갈량은 다른 동년배와는 달랐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유학의 이념을 추구하되, '경세제민'을 이루는 수단과 방법론에 대해 보다
집중적으로 천착했다.


2. 이런 연장선에서 경제와 병법을 대단히 중요시해 법가적 방법론에도 정통했다.


3. 배우는 청년들이 궁정이나 제후의 관리로서 등용되는 데 집중한 데 반해,
그는 천하 전체를 위한 그림과 꿈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고 밀고 나갔다.


이 차이는 대단히 크다. 우선, 제갈량은 유학의 기본서적을 모두 섭렵하면서도 남들처럼 경전의 자구와 글자의 의미에 집중하는 훈고학적이고 미시적인 접근방식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실제의 현실과 생활에 도움을 주지 않는 학문은 인정하지 않았다.

같이 교유했던 동년배의 서서 맹건 석도 등은 그런 입장에서 경전을 정치하게 해석하고 주석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잘한 것만 집중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론을 폈다.

그가 양양 융중에서 주경야독을 하면서 여러 농기구를 개량해서 주변 농민들에게 보급했다는 이야기라든지, 나중에 위나라를 정벌하는 원정에 나서 험준한 산악지대에서의 군량 수송을 위해 나무로 된 수송수단 '목우유마'를 만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발명가 제갈량의 신화는 모두 현실에 바탕한 고민과 접근방식이 쌓이고 쌓여 이뤄진 것이다.


  
▲ 제갈량을 그린 그림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제갈량이 경제와 군사를 중심으로 한 법가적 방법론을 크게 선호했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애독한 분야의 서적에서부터 드러난다.

그는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을 '춘추 5패'(춘추시대 패권을 잡은 바 있는 5나라의 왕)의 하나로 만든 명재상 관중의 저서 <관자>를 애독하고, 연나라가 주변 강대국 제나라로부터 70여 개 성을 빼앗는 대성공을 거두도록 한 악의의 병법서에 심취했다.

대표적 법가 사상가의 저술인 <신자>(신불해의 저술), <한비자>(한비자의 저술)도 열독했다. 나중에는 스스로 <논전한사>(전한의 역사를 논한다)라든가, <한서음>(역사서 한서에 대한 소감)이라는 역사평론을 남길 정도로 그는 병법서와 역사서에 심취했다.

나중에 군령을 어긴 자신의 수제자 마속을 눈물을 흘리며 참수하는(읍참마속) 결단을 내린 것도 그의 대표적인 법가적 접근방법을 잘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그는 학문의 목적을 개인의 영달 등 작은 데 두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과 심혈을 기울여 천하를 제대로 바로잡고 구한다는 보다 크고 이타적인 목표를 향해 매진했다.

이런 자세는 그가 동년배들에 대해 "자네는 그리 하면 태수나 군수는 되겠네."라고 평하곤, 자신은 "관중이나 악의가 돼야지."라고 포부를 밝히곤 했다는 데서 잘 읽을 수 있다.

세상을 놀라게 한 천하삼분지계
이런 배움과 학습으로 단련하고 성장한 그는 (설화대로라면 착융의 칼날 앞에 섰던 때로부터) 11년 뒤 극적으로 한 영웅을 만난다. 그가 26살이 되던 때다. 황제의 후손이라는 이 영웅은 47살로 제갈량보다 21살이 위였지만, 아직 초라하기 짝이 없는 신세였다.

*여포에게 서주를 빼앗기고 한때 적이었던 조조에게 망명...
*황제의 밀명으로 조조 제거 계획에 가담했다가 탈출해 원소에게 망명...
*원소의 주력군에서 이탈해 예주목으로 있다가 조조에 쫓겨 다시 유표에 망명...

서기 207년 영웅 유비는 그런 처지에서 형주 융중의 초려를 세 번째 방문한 끝에 제갈량을 만난다. 당시 47살이었던 유비는 별 볼 일 없는 망명장군의 신세이면서도 놀랍게도 자신의 주변에 인재들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관우 장비 조운 등 무장들과 손건 미축 등의 문신들…. 그러나 당시 26살에 지나지 않는 이 천재 전략가로부터 나오는 계책은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이 영웅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 촉승상제갈량문집 [출처=e뮤지엄]

"지금 조조는 100만이나 되는 무리로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고 있으니 그와 다투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손권 역시 삼대의 통치로 안정돼 있는데다가 능력 있는 이들을 등용하고 있어 연합세력이 될 뿐이지 공략할 수는 없습니다….

형주는 지리적으로도 반드시 차지해야 할 곳으로 지금 이곳을 차지한 자는 지킬 능력이 없으니 여기를 취해야 합니다. 익주는 비옥한 땅이 천리나 이어진 천연의 부고로서 역시 주인이 무능해 총명한 새 주인을 바라고 있습니다…. 만약 형주와 익주를 차지해 서쪽과 남쪽의 각 민족을 어루만지며 손권과 연합한 뒤 천하의 형세 변화가 있을 때 형주와 익주 양면에서 북벌을 감행한다면 통일의 패업은 달성될 것입니다."

천하삼분지계-이미 북방을 평정한 막강한 조조의 세력과, 장강의 지세에 의지해 강남을 공고하게 장악해가는 손권의 세력에 맞서 중원의 남서쪽에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천하를 삼분한 뒤 궁극적 천하통일을 달성하자는 계책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다.

동양 5000년 역사에서 사실상 최고의 참모로 꼽히곤 하는 제갈량의 천하 데뷔를 알리는 이 천하삼분지계는 다음 세 가지 점에서 세상을 놀라게 한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는 삼국지의 결정적 장면이다.


1. 그 발상 자체가 탁월했다.
2. 실제로 역사는 이 발상에서 예견한 대로 흘러가는 등 정확한 미래예측 능력을 함축하고 있다.
3. 무엇보다 이 발상 자체를 근본부터 불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사건들이 삼고초려 직후 잇따라
터져 나왔는데도 이 모든 난관을 헤치고 제갈량은 발상의 원래 그림을 관철시켜 나갔다.


이 전략을 바탕으로 만년 패배자-도망자였던 유비는 삼국정립의 한 축을 장악해 촉나라의 황제에 오른다. 제갈량은 유비의 천하통일의 꿈을 평생 보필하는 충신으로서, 명재상으로서, 전략가로서 중국역사의 위대한 인물로 정립된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충절과 능력, 높은 이상을 기려, 비록 그가 천하통일을 달성하지 못했어도 더없는 존경의 마음을 담아 기렸다. 최고의 참모가 최고의 충신과 결합한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이 약소국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다가 쓰러지는 비극적 서사구조 앞에 숱한 동양권 민중들은 1800여 년 동안 하염없는 슬픔과 함께 끝없는 사랑을 기울이는 것으로 보답한다.

“성신 제갈량!"…. 너무나 고결하고 훌륭하기에 성스럽다고 할 수밖에 없는 신하….”

그는 촉나라의 재상으로 20여 년을 지냈음에도 재산은 뽕나무 800그루, 거친 밭 15경 정도만을 남겼다. 그의 아들과 조카도 촉을 지키다가 목숨을 바쳤다. 그는 이미 15살 전쟁터에 죽음 앞에 설 때부터 이미 자신을 위한 것들은 모두 비웠던 것이 아닌가?


시성 두보, 제갈량 향한 존경과 애정을 시로 노래하다

삼고초려 이래 숱한 천하의 계책 내고 三顧頻繁天下計

양조 열어 빚 갚는 늙은 신하의 마음이여 兩朝開濟老臣心

출사해 이기지 못한 채 몸이 먼저 스러지니 出師未捷身先死

영원히 영웅의 눈물 옷깃 적시게 하누나 長使英雄淚滿襟


*에듀진 기사 원문: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561
 

  
▲ <나침반36.5도> 정기구독 http://goo.gl/bdBmXf



관련기사

93건의 관련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