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8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번쩍! 인류 철학사에 ‘들뢰즈’란 번개가 내리쳤다!

철학, 문학, 영화 예술 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프랑스 철학가

낡은 철학, 변화의 폭풍을 맞이하라
끊임없이 흐르는 물속에 가만히 박혀 있는 바위를 떠올려보자. 아무리 단단하고 굳센 바위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모양이 변할 수밖에 없다. 물이 흐르기 때문이다.

바위는 처음엔 주변의 풍경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었을 지라도, 또 누군가 물을 건너기 위한 징검다리가 되어주었을 지라도 오랜 시간이 흐르면 더 이상 그 모습과 역할을 간직할 수 없다.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만을 이야기할 것 같은 ‘철학’에게도 이 바위와 같은 시련이 찾아왔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바위는 깨지고 부서져 작은 조약돌이 될 수 있다. 아니면 더 작아져 모래알이 되어 먼 바다로 흘러갈 수도 있다. 이도 아니면 엄청난 지각변동을 겪고 높은 산이 되어 경치를 이룰 수도 있다. 그렇다면 철학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이 같은 물음에 철학자 ‘질 들뢰즈’가 내놓은 해답은 철학, 나아가 세계가 변화하는 거대한 폭풍을 몰고 왔다.

고대·중세철학은 ‘계단’과 같고
고대와 중세 철학은 본질주의 철학이었다. 이 세계와 우주를 구성하는 본질이 있고, 그 중 가장 중요한 ‘본질 중의 본질’에 의해 이 세계가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본질 중의 본질은 플라톤의 ‘이데아’의 개념이나 ‘신’과 같이 절대적으로 만물의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본질이 중심이었던 고대·중세 철학은 신을 가장 높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로 인식하고, 그 아래는 천사, 그 다음은 인간, 동물, 식물, 광물 등의 순서로 모든 존재와 사물의 가치를 매겼다. 마치 사다리나 계단의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차례대로 가치의 순서를 매기는 선형적인 위계로 세상을 바라본 것이다.

근대철학은 ‘태양계’와 같다!
근대에 이르러 철학은 ‘주체의 철학’으로 변화한다. 고대와 중세에서 계단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던 ‘신’의 자리에 ‘인간’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세우고, 이성의 힘에 한없는 신뢰를 던지며 신의 섭리 또한 이성으로 증명하려고 했다.

철학을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데카르트의 명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 역시 직설적으로 해석하면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가진 이성에 기대 무엇이든 의심하고, 그것의 존재와 원리를 증명해내려는 근대철학의 정신이 함축돼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는 마치 태양을 중심으로 원의 궤도를 그리며 회전하는 태양계의 별들처럼, 인간을 중심축에 두고 세상 모든 것이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배열되는 모습으로 바뀐다. 이때 인간과 얼마나 가깝고 머냐에 따라 사물들의 가치가 정해진다.

철학이 만드는 ‘가치’의 감옥
들뢰즈가 보기에 고대·중세철학은 가치를 일방적으로 규정하고 억압하는 편협성을 지닌 사유방식이었고, 근대 철학 역시 이 점을 극복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들뢰즈는 모든 가치를 한 자리에 고착시키는 이 구조에서는 어떤 변화의 가능성이나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세계에 접근하는 새로운 사유 방식을 찾기로 했다.

들뢰즈는 신이나 인간을 중심에 놓고 모든 사물을 위계적으로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이 평등하게 ‘그리고’의 관계를 맺으면서 관계를 맺어 나가는 것을 꿈꿨다. 사물들의 위치가 강력한 존재에 의해 억압적으로 정해진 배열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 사이에 서로 관계를 맺으며 ‘그리고(and)’와 ‘사이(between)’의 연결을 형성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리좀(Rhizome)’이라고 불렀다.

사물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고 하더라도 관계 그 자체가 고착화되면 사물 사이에 위계와 억압의 구조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들뢰즈는 이것을 경계하면서 사물 A와 B 사이에 있는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런 식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리좀 철학은 어떤 것이 무엇과 관계하는가에 따라 본질이 달라지고 관계의 질이 달라진다는 ‘유목적인’ 사유방식이다.

들뢰즈, ‘리좀’을 제시하다
들뢰즈는 모든 존재와 사물을 두고 ‘기계’라고 부른다. 이들은 다른 존재, 다른 사물들과 만나 접속함으로써 그 자신의 속성이 달라진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존재와 사물은 다른 것들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손’은 다른 기계와 만나 누군가를 ‘돕는 손’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해치는 손’이 될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도구를 사용하는 손’이나 감각을 활용해 무엇인가를 ‘만지는 손’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기계는 접속을 통해 기능이 규정되는 존재인 셈이다.

이 다양한 기계들이 서로 접속을 통해 하나의 장을 형성하는 것을 ‘영토화’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 지우개, 학생, 교사, 칠판, 선생님 등이 모여 ‘교실’을 이룬다. 이 교실이 바로 영토화인 것이다. 한편 교실은 ‘공부를 하는 곳’, ‘책상 위를 뛰어다니면 안 되는 곳’, ‘떠들면 안 되는 곳’ 등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규칙이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영토를 규정하는 ‘코드화’이다. ‘영토화’와 ‘코드화’가 합쳐져 하나의 장, ‘배치’를 만든다. 들뢰즈는 세계를 ‘영토화’와 ‘코드화’가 합쳐진 하나의 장으로 보았다.

‘유목하는’ 철학으로 탈출하라!
여기까지 알게 된 여러분은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 사유방식이 결국 세상을 이끌어가는 ‘창조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들뢰즈는 ‘세계’라는 장에 배치를 이루는 모든 존재를 ‘욕망하는 기계’라고 보았다. 여기서 욕망은 곧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으로 플라톤의 ‘동일성의 철학’과 대비되는 것이다. 고대철학에서 플라톤은 “우리는 본질을 좇아야 하는데 세계는 바로 이 본질의 모방이며, 예술은 세계의 모방이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라고 보았다. 따라서 당시 예술은 단순히 자연을 얼마나 닮았느냐를 가지고 좋은 그림인지, 나쁜 그림인지를 평가받고 천시됐다.

하지만 들뢰즈는 달랐다. 이 ‘차이’야 말로 창조의 힘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차이가 사물 사이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차이에 대한 욕망은 영토와 배치를 탈출하게 만든다. 욕망이 있는 한 배치를 뛰어넘으려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규정하고 있는 울타리 바깥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때 이 탈출을 꿈꾸는 욕망이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생명의 불꽃’과도 같다고 보았다.

이처럼 질 들뢰즈는 기존의 철학 방식에서 벗어나,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으로 철학사를 바라보고 있다. 들뢰즈의 새로운 시각은 철학사에 새로운 흥미진진한 논의거리를 제공하면서 철학사 이해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저작권자 © 에듀진 나침반36.5도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관련기사

93건의 관련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