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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캠프

‘동양화 그다음’을 위한 박래현의 감격적 분투

 
박래현(1920-1976)은 동양화라는 한계, 여성이라는 굴레를 뛰어넘는 고지(高地)를 향해, 예술로써 당시 여성의 사회적 역할, 그리고 재료와 기법의 고정관념에 매몰되길 거부한 모험가이자 도전자였다. 그는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동양화를 모색하며 재료와 기법의 벽을 넘어 세계 화단과 교감할 수 있는 추상화, 태피스트리, 판화까지 폭넓게 탐구했다. 양육, 가사의 굴레와 부군 운보 김기창 화백의 그늘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동양화를 위한 선구적이며 의지적 행보를 보여주는 지점은 그의 작업 생애에 걸쳐 나타나는데, 그중에서도 말년의 판화 작업에서 이러한 작가적 특질이 도드라진다. 
 

 
그는 1969년 뉴욕 프랫 그래픽 아트센터(Pratt Graphic Art Center)로 유학길에 올라 본격적으로 판화 작업에 매진하게 된다. 먼저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유학 중이던 큰딸을 따라간 것인데, 자녀 양육도 소홀히 하지 않았던 박래현의 성품으로 미뤄 짐작건대, 딸을 보살피기 위한 모성의 마음도 함께 있지 않았을까. 딸 또한 엄마를 위해 자신이 재학 중인 학교의 부설 기관으로 입학을 도왔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유학 중에도 전시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1973년 하와이예술아카데미가 주최한 ‘국제판화전’에 참가, 이때 출품한 판화 ‘기원’이 기관에 영구 소장되는 성과도 이룬다. 미국에 1974년까지 머물며 판화를 공부하고 작업을 펼쳐왔으니, 5년에 이르는 짧지 않은 시간을 판화 연구에 쏟았다. 
 

작가가 판화에 푹 빠지게 된 구체적인 이유는 전해지지 않지만, 현대 판화를 전위적인 매체로 바라보던 당대 화단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영향이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판화 이전에 박래현은 인물화 등의 구상작업에서 추상화로 전향하는데, 이러한 변모는 1960년 전후부터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때는 박래현이 뉴욕, 타이완, 도쿄 등에서의 국제적인 전시 활동에 더욱 활발하게 나선 시기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1961년 ‘제10회 백양회전’에서 내보인 먹과 테레핀유를 함께 발라 마티에르를 강조한 작품 등은 박래현이 색다른 시도를 열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후 1962년 즈음부터 박래현은 추상화를 본격적으로 전개해나갔고, 이렇듯 새로움을 갈구하던 작가였기에 판화에까지 안착하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1974년 귀국한 작가는 신세계미술관에서 ‘박래현 판화전’을 열고 1970년부터 1973년까지 뉴욕에서 제작한 판화와 태피스트리 등 60여 점을 선보인다. 같은 해 말, ‘제4회 한국현대판화가협회전’에 참가하는 등 판화 작업을 내보이는 데 큰 열정을 보인다. 귀국 후 선보였던 작업들은 미국에서 배워온 판화를 동양화와 접목한 것으로서 박래현의 야심 찬 신작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귀국 후, 1974년 3월 9일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에세이 ‘나의 신작, 기원 ‘혼돈의 시작’ 표현시도’에서 박래현은 판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붓으로 그리는 맑은 여백의 동양화를 하다가 뉴욕에서 판화와 만났다. 평소 화선지의 한계에서 벗어나 보려던 나에겐 깊고 절실하게 구체적으로 손에 잡혀 표현되는 여러 가지의 판화기술이 매혹적이었다. 예술이라는 말과 곧잘 상반되는 단어로 쓰이는 기술이라는 것이 작가의 예술성을 깊게 해줄뿐더러 표현방법에 의외의 확대를 가져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애초에 판화를 배운 계기가 판화 기술을 동양화에 접목하기 위함이었으므로, 서로 다른 두 매체의 접점을 찾으려 한 노력의 흔적이 작품 다수에서 발견된다. 김예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의 ‘박래현, 삼중통역자’전(展) 기획의 글에 따르면 해당 작업들은 이러했다. “‘어항’ ‘고완’ 등은 한지 위에 그려진 그림을 판화지(이 작품에서는 장지가 사용되었다) 위에 배접하는 형식으로 제작되었는데, 화폭이 바탕지 위에 층으로 쌓여 있는 것은 플레이트의 이미지가 판화지 위에 얹히는 것과 유사하다. 거친 붓질로 여러 가지 채색을 쌓아 올려 중첩된 바탕색을 만든 것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지 그림이 바탕지 위에 부착되어 있는 것은 에칭 기법 중 하나인 친 콜레 기법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1975년 7월 ‘(판화로써)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았다’라며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지만, 이때 간암이 발병했음을 알게 된다. 미국에서 치료를 시도하나 병고가 악화돼 그해 11월 한국으로 돌아와 투병 중 이듬해 1월 세상을 떠났다. 정열적인 그의 생(生)과 같이 죽음마저도 손쓸 새 없이 몰아치듯 덮쳤다. “뉴욕에서 6년간 판화를 배운 그 분위기와 과정이 앞으로의 내 작품에 어떤 영향을 줄지 나 자신도 궁금하다”라며 앞으로의 작업에 대한 열의와 설렘을 보였던 작가는 결국 이를 채 펼쳐 내보이지 못하고 5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오늘날 시각으로 박래현의 작업을 다시 돌아보고 이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전시가 마련된다. 개인전 ‘박래현, 사색세계(Park Rehyun– Rumination)’가 3월 4일 서울 광화문 아트조선스페이스에서 개막한다. 이번 전시는 아트조선스페이스 개관전 시리즈 두 번째로 마련된 것으로, 작가의 작업 생애를 기준으로 1, 2부로 나눠 개최된다.
 

3월 4일부터 3월 26일까지 열리는 1부 ‘생동하다(Vibrant with Life)’에서는 작업 초창기에 속하는 채색화와 드로잉 등을 위주로 선보이며, 4월 8일부터 4월 23일까지 열리는 2부 ‘피어나다(In Bloom)’에서는 판화, 태피스트리, 콜라주 등 작가의 실험적 면모를 볼 수 있는 대표작을 내건다.
 

 
한 달 넘는 전시 기간, ‘박래현표’ 여성 인물화의 시작을 알리는 그의 대표작이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수상한 ‘단장’(1943), 일견 피카소의 큐비즘을 연상하는 화풍의 대한미협 대통령상 수상작 ‘이른 아침’(1956) 등을 비롯해 동양화의 기법 확장을 위한 노력이 고스란히 드러난 ‘기억’(1970~1973), ‘희열의 상징’(1970~1973) 등 박래현의 대표적인 판화 작업이 공개된다.
 

 
박래현은 전 작업 생애에 걸쳐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로운 시도에 거침없었다. 동양화의 근원적인 정체성에 충실하면서도 시대에 맞게끔 발전시키고 변혁시키려 했던 작가는 단순히 신기술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닌, 매체의 경계나 한계가 없는 실험적 모색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다음 세대 동양화’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다. 국제 미술계에서 동양화가 어떻게 호흡하고 뿌리를 뻗어 나갈지, 동양화의 현대화를 어떻게 실현할지 그 실마리를 동시대 미술 속에서 찾고자 한 박래현의 감격적인 분투를 이번 전시에서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아트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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