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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바바’ 회장이 전 세계 꼴찌들에게 던지는 희망의 메세지

거대한 반격으로 세상을 재패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못난이 마’라고 불릴 정도로 외모에서 그리 호감을 주는 편이 아니었다. 그는 수학을 못해서 고교입시를 재수하고, 역시 수학 때문에 대학입시도 2년이나 낙방했다. 재수할 때와 대학 다닐 때는 일의 성격을 가리지 않고 수없이 구직신청을 했지만 모조리 떨어졌다. 하도 억울해 경찰관을 데리고 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한테 안 맞아!”란 매몰찬 답변을 들으며 무려 30차례나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후 자기 사업을 시작했지만 3번이나 실패했다.

이처럼 실패와 좌절, 따돌림으로 얼룩진 10대와 20대 시절을 보낸 이는 놀랍게도 오늘날 중국 최대, 그리고 세계적인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 그룹의 회장이며, 중국 부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인 마윈이다. 만약 그가 실패를 거듭하고 좌절했을 때 주저앉아 포기했다면 이러한 더 큰 성공을 얻을 수 있었을까?

천덕꾸러기 마윈, ‘잭 마’로 거듭나다

마윈은 1964년 중국 항저우의 한 가난한 전통극 배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직 문화혁명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절 항저우의 경극이라고 할 수 있는 평탄 역시 문화혁명파로부터 공격받으면서 평탄 배우였던 아버지는 일자리마저 잃어버렸다. 또한 마윈은 가난한 집안 출신인데다가 작은 키, 그리고 못생긴 외모로 인해 쉽사리 놀림거리가 됐다.

그런 소년시절에도 마윈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바로 영어다. 12살 때 스피커 모양의 라디오를 통해 영어를 들은 뒤 소년은 매일같이 영어방송을 들었다. 마윈은 영어가 정말 재미있었다. 학교의 영어선생님을 좋아하게 되면서 영어는 더더욱 소년을 끌어당겼다. 그렇게 그는 매일 사전의 영어단어를 열심히 외웠다.

영어에 대한 마윈의 열정은 점점 더 커져갔다. 소년은 중국 강남의 대표적인 고대도시이자 관광도시 가운데 하나인 항저우 중심가 큰 호텔에 가면 영어를 하는 외국인들과 직접 영어회화를 해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45분 동안 자전거를 몰아 항저우호텔까지 갔다. 그리고 외국인들에게 공짜로 항저우 관광 가이드를 해줬다. 또 친해진 관광객과는 오랫동안 펜팔도 주고받았다. 이 시절 한 외국인 여성은 그에게 ‘잭’이라는 영어이름을 줬는데, 그는 지금도 이 ‘잭 마’라는 영어이름을 쓰고 있다.

신기하게도 그 이름은 그의 미래를 강렬하게 예감케 하는 듯 하다. 영국의 유명한 동화 <잭과 콩나무>에서 조금은 바보스러운 주인공 소년 잭이 결국 콩 넝쿨나무 위의 거인을 무너뜨리고 큰 부와 성공을 거두는 해피엔딩을 이뤄내지 않는가? 마윈은 무료 가이드 일을 9년 동안 계속했다.
 
   
고교, 대학 시절 마윈을 열패감에 빠지게 한 ‘수학’

영어는 그렇게 그의 편이 돼 주었지만, 수학은 두고두고 그를 괴롭혔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은 중하위권이었다. 한 시험에서는 31점을 맞은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첫 번째 대입연합고사 ‘가오카오(高考)’에서 받은 수학점수는 단 1점이었다.

그는 열패감에 사로잡혔다. 한동안 방황하다 이듬해 다시 대입에 도전했다. 또 떨어졌다. 수학점수는 좀 올랐지만 19점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삼륜자전거의 운전수 등 허드렛일을 하다가 다시 이듬해 도전했다. 수학 89점을 맞았다. 그러나 이공계열로 가기에는 총점수가 5점 모자랐다. 영어 전공 기준점수에도 조금 모자라 간신히 부전공으로 허가받았다. 그런 곡절을 겪은 뒤 결국 항저우사범대학 외국어본과로 전과할 수 있었다.

30년 전, ‘인터넷 세상’이 열릴 것을 직감했던 마윈

그는 험한 고생 끝에 대학에 들어가자 열심히 공부했다. 운전기사 신문배달 막노동 따위를 하며 학비도 버는 등 모범적인 학생으로 변모했다. 학생회의 주석(회장)도 맡고, 나중에는 항저우시 학생연맹의 주석까지 됐다.

1988년 마윈은 항저우사범대학 외국어본과를 졸업한 뒤 항저우전자공업학원의 교사로 배정됐다. 영어 및 국제무역 교사 자격이었다. 그는 열심히 가르쳤다. 그 결과 항저우시 우수청년교사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 달 월급은 12달러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부업으로 항저우의 대형호수 옆에 작은 영어서비스업체 하나를 세워 운영하기 시작했다. 1992년 영어 번역이나 통역을 의뢰하는 사람이 제법 늘어나자 그는 ‘해박번역사’라는 통역 겸 번역 회사를 정식으로 세웠다. 나중에는 의학서적을 번역해서 대학이나 병원 그리고 의대생들에게 서비스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 무렵 그는 매우 소중한 경험을 한다. 1994년 출장으로 미국에 간 그는 인터넷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접한 것이다. 처음 그가 인터넷에서 검색한 단어는 ‘beer(맥주)’였다. 맥주에 관한 여러 나라의 많은 정보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중국의 맥주에 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시 ‘중국’에 관한 일반적인 정보를 찾아보았지만 역시 그마저 하나도 없었다.

마윈은 여기에서 실험적인 생각을 하나 떠올린다. 그리고 같이 미국에 간 친구와 함께 그 자리에서 조잡한 중국관련 사이트를 하나 만들어보았다. 오전 9시 40분 사이트를 만들어 올리고 채 3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몇 군데에서 이메일이 날아왔다. “그 사이트가 무엇을 하는 데인가요?”라고 물어온 것이다.

그때 그는 ‘이 기술은 곧 세상을 천지개벽시킬 것이다’라고 직감했다. 그렇게 1년 뒤인 1995년, 그는 항저우전자공업학원을 사직하며 받은 퇴직금, 그리고 항저우사범대 동창인 처 장잉 그리고 매부로부터 빌린 돈을 합쳐 2만 달러 정도를 자본금으로 삼아, 중국판 인터넷 옐로 페이지인 ‘차이나 옐로 페이지’를 창업했다.

차이나 옐로 페이지가 처음으로 중국기업들의 사이트를 만들어줄 때 마윈은 아는 친구들을 자기 집으로 불러 모았다. 전화모뎀을 통해 접속시킬 때 시간이 3시간 반이나 걸렸다. 마윈은 그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는 기다리며 음료를 마시고 텔레비전을 보고 카드놀이를 해야 했다... 하지만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집에 모인 손님들에게 인터넷이라는 것이 세상에 정말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패에도 굴하지 않은 믿음, ‘알리바바’를 탄생시키다

하지만 중국에서 가장 초기에 등장한 인터넷 기업으로 꼽혔던 ‘차이나 옐로 페이지’는, 눈에 띨 만큼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는 “중국에서 인터넷 사업을 하면서 매우 외로웠다. 누구도 날 믿지 않았고, 나도 내가 뭘 말하고 있는지 몰랐다. 심지어 나는 인터넷은 물론 컴퓨터 기술에 대해서도 아무 것도 몰랐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인터넷 세상이 올 것이라는 확신뿐이었다.”라고 말했다.

1998년 마윈은 차이나 옐로 페이지를 매각하고 중국 정부 산하의 중국국제전자상무중심이라는 기관의 총경리(사장)로 초빙돼 갔다. 그는 차이나 옐로 페이지에서 같이 일하던 직원 여럿도 함께 데리고 베이징으로 갔다. 거기서 마윈 팀은 좀 더 큰 틀에서 좀 더 다양한 일들을 경험하며 인터넷 비즈니스의 가능성을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구상하게 된다. 1999년 드디어 마윈과 그 팀원 17명은 항저우로 내려가 초기 자본금 50만 위안으로 중국을 기반으로 한 기업간 거래 사이트 알리바바를 창립한다.

   
고전하던 초기의 알리바바, 그가 내린 ‘특단의 조치’는?

알리바바의 설립 초기에도 여전히 고전의 연속이었다. 20평 크기 아파트에서 직원들끼리 서로 끼니만 근근이 때우며 사이트를 개설했지만, 한동안 매출이 없었다. 그런데 이 때 마윈은 소프트뱅크 창업자 손정의와 다른 국제벤처캐피털 한 곳 등 두 곳으로부터 총 2,500만 달러의 투자를 받아 살아나게 된다. 손정의와 벤처캐피털을 설득한 마윈의 전략은 이렇다.

“중국에 수백만 개의 공장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그들을 서방세계에 알리고 양지로 끌어낼 수 있을까?... 바로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

“상어를 잡으려면 큰 부상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상어의 먹이인 새우를 장악하면 다치지 않고 상어를 잡을 수 있다”

이 전략은 나아가 중국은 물론 아시아권, 나아가 세계 중소기업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됐다. 세계무역기구 체제와 온라인 국제거래가 활성화되는 거대한 온라인혁명의 물결 속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기업들에게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최적의 마켓플레이스를 알리바바가 펼쳐주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원료나 부품은 세계 어디에서 사고, 어디에다 팔아야 하는지 고민해온 중국의 중소기업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2001년 12월, 알리바바에 등록된 사업자 수는 100만 명을 넘어섰다. 알리바바의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이전보다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된 세계의 중소기업이 환호하기 시작했으며, 곧 이어 그런 물건들을 싸고, 쉽고, 편리하게 살 수 있게 된 소비자들의 환성이 세계 곳곳에서 울려 퍼져나갔다.

탁월한 통찰력과 결단력으로 세계 최강 ‘이베이’를 물리치다!

마윈은 2003년 당시 세계 최대 최강의 온라인거래 사이트인 미국의 이베이가 중국으로 진출하면서 알리바바 대 이베이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이 위기를 탁월한 통찰력과 결단력으로 돌파해냈다. 이베이가 처음 중국의 온라인 거래 사이트에 거액을 투자하자 마윈은 곧 전쟁이 벌어질 것을 알아내곤 미리 충분한 군자금을 비축하고 자신이 잘 하는 싸움방식을 준비해놓고 기다렸다.

당시 이베이는 중국에서도 미국식 온라인유통전략을 사용했다. 그러나 마윈은 가입자의 수수료를 3년 동안 받지 않는 전술로 역습을 벌였다. 나아가 지방을 중심으로 압도적으로 많은 중소기업 가입자와 잠재 온라인 소비자들을 끌어 모아 포위전도 병행했다. 결국 도시의 대기업 중심주의에, 중산층 이상의 신용카드 사용자만을 염두에 둔 이베이의 반중국적인 사업방식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처럼 알리바바라는 ‘양쯔강의 악어’는, 미국을 기반으로 ‘오대양을 누비는 상어’인 이베이를 중국에서 몰아내는 신흥강자로 세계에 각인됐다. 세계 최강의 라이벌을 단 3~4년 만에 물리치고 급기야 몰락으로 내몬 마윈의 전략은 마치 ‘전광석화’처럼 무협지의 스피드와 파워를 연상시킨다. (사실 그는 태극권 진가권의 고수로 이연걸과 함께 알리바바의 태극권 사범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청소년 때부터 무협지에 깊이 빠져있었고, 지금도 회사 건물과 사무실 곳곳에는 달마원, 취현장, 협객도 등 온통 무협지에 나오는 이름을 붙여놓았다.

현재 알리바바 집단은 세계 최강의 온라인유통기업이자 정보통신기술집단으로 부상한 미국의 ‘아마존’과 대적할 수 있는 맞수로 비상했다. 그렇게 항저우 출신의 ‘못난이 마’는 온갖 역정을 거쳐 이제 아시아권을 중심으로 ‘흙수저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마윈의 성공 비결 6가지!

알리바바를 일군 흙수저 마윈의 성공비결은 여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흥미 있는 일에 집중한다. 좋아하는 영어에 집중한 힘이 결국 그에게 인터넷을 열어주고, 세계 차원의 유통전쟁을 치러 낼 수 있게 하지 않았는가?
둘째, 고난 따위에 지치지 말자.
셋째, 흙수저의 마음을 읽어라. 세계 시장에 들어가는 것을 너무나 힘들어 하는 너무나 많은 약자가 있다는 걸 약자 출신인 그는 알았다.
넷째, 결정 뒤에는 스피드뿐!
다섯째, 사람을 끌어당기는 게 힘이다. 손정의도 제리양도 그의 설득력과 통찰력에 이끌려 수백억, 수천억을 투자했다.
여섯째, 나의 무협공간! 나의 디지털공간! 오직 그를 통해 무협지의 상상력이 디지털과 닮았음을 우리는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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