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과 이를 바라보는 이 사이의 만남을 성사시키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작품을 보는 것 자체는 3초 정도면 끝나지 않습니까. 재미가 있어야 보는 이의 시선을 끌어들일 수 있고 그게 바로 작가의 역량일 테죠. 제 작품이 좀 날카롭습니다. 눈동자를 면도칼로 베어내는 듯한 그 날카로움이 3초 볼 사람을 5초까지라도 볼 수 있게 한다면 참 좋겠어요.”
정교하면서도 어지럽게 산재한, 동시에 패턴인 듯 아닌 듯 건축적이고 기하학적인 이미지들이 화면을 종횡하며 보는 이에게 해석과 감상의 자유를 열어 놓는다. 이들은 고정된 의미를 지니지도, 결과를 강제하지도 않는다. 그저 호기심 가득한 관람자의 시선을 일순이나마 더욱더 오래 붙잡고자 수다스러운 향연을 펼쳐낸다.
이상남(69)은 디지털 세계를 상징하는 소재들을 아날로그적인 고유의 기법으로 투영해 우리 시대를 통찰하는 풍경을 그린다. 이른바 ‘추상 풍경’이라 불리는 그것은 작가가 직접 인간 문명이 남긴 도상과 부호들을 수집하고 그 이미지를 곱씹어 만든 수많은 기하학적 조형 기호들을 구성하고 조합한 결과다.
그는 “추상을 해부하고 분해하고 그렇게 파편화된 것을 다시 조각한 것이 내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칠하고 갈아내기를 100회까지도 반복하는 수행적인 과정을 통해 완성된 그의 인공적인 추상화는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존하는 오늘날 우리의 삶을 사유한다. 이상남의 인공적인 풍경들은 지난한 수작업과 공력을 필요로 하는 동시에 페인팅과 디자인, 건축 영역의 샛길을 유연하게 가로지른다. 이미지와 정보 과잉의 현시대에 관객의 시선을 빼앗을 그의 회화는 시각적인 상상, 재미, 정화 등 모든 것이 가능한 여정과도 같다.
“작업이란 꼭 거대 담론을 생성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보기에 아름답다면, 또 보는 이가 좋아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죠. 작품은 내가 아닌, 보는 이들에 의해 최종 완성되는 것이니까요.”
이상남 개인전 ‘감각의 요새(The Fortress of Sense)’가 4월 16일까지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가로 3.8미터 길이의 대형 회화 작업을 포함, 이전 작업과 비교해 공간감은 더욱 깊어지고 조형언어는 더 풍성해진 미발표 신작을 소개한다.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는 “이상남은 온종일 작업에만 매몰돼 있는 ‘작업 기계’ 같은 작가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현재 모습으로써 정면 승부하듯이 최근작과 대작 위주로 구성한 자리”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상남은 1978년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81년 도미해 뉴욕에서 작업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뉴욕 엘가위머 갤러리, 암스테르담 아페르 갤러리를 비롯한 국내외 유수 미술기관에서 2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현재 경기도미술관, 주일 한국대사관, 폴란드의 포즈난 신공항 로비 등의 공공건축물에서 영구 설치된 그의 대규모 회화를 볼 수 있다.
출처: 아트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