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민중미술과 적폐청산的 미술 담론⑤] 남한의 민중미술과 북한 관치(官治)미술의 공통점

히틀러는 1933년 권력을 잡자마자 나치 정부의 문화부 수장으로 정치 선전과 선동을 담당했던 괴벨스를 시켜 아주 특별한 미술전시를 기획했다. 당시 현대미술로 여겨지던 표현주의, 큐비즘, 추상미술, 초현실주의 등의 작품 5000점 이상을 미술관과 일반 소장자로부터 강제로 압수해 모았다. 전시명은 ‘타락한 미술(Entartete Kunst)’이라고 붙였다. 히틀러는 이 작품들이 독일 민족의 인종적 순수함과 우월성, 독일 군대의 영웅성, 독일 사회의 신앙적 복종성을 거부하고 조롱하는 불결한 유대인 미술이라고 비난하면서 미술계의 숙청을 감행했다. 미술품들을 불태우고 작가들에게 작업 금지령을 내리고 학교 강단에서 축출했다. 그리고 개인적 관심과 고민, 방황, 표현의 자유를 담은 작품은 철저히 배제시키고 나치 체제의 목적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어용(御用)미술만 인정하였다.
 
현재 전 세계에 히틀러처럼 정치적 기준에 의해 특정 미술만을 독려하여 미술을 극렬하게 획일화하는 곳이 있다면 북한미술계가 유일할 것이다. 1960년대 초 북한 미술계에서는 수묵화와 채색화에 관한 논쟁이 일어났었다. 이 논쟁은 1966년 김일성이 결론지었다. <우리의 미술을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은 혁명적 미술로 발전시키자>라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우리의 전통 채색화를 통해 조선화(북한 미술)를 사회주의 미술로 발전 시켜 나가야 한다고 지시했다.

 

 

북한미술사를 이해하려면 김일성-김정일의 어록만 보면 된다. 북한미술은 김일성-김정일이 내린 조선화의 내용과 형식에 관한 교시(敎示)에 철저하게 입각하여 만들어지는 관치(官治)미술이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채색화로 북한미술의 노선을 결정한 이유는 북한 사회주의 혁명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홍보하는데 채색화 기법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수묵화는 봉건 지배계층의 음풍농월(吟風弄月)이므로 배격되어야 했다. 전통 채색화라는 ‘우리 민족’의 기법을 중요시하는 것은 서양의 개인주의적 미술 사조는 부패하고 타락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북한미술의 모든 논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회주의 혁명에 예속되어 있다. 
 
이렇게 정치성이 핵심이 될 때 미술은 획일화된 모습을 띤다. 조선화건 조형물이건, 단체 작품이건 개인 작품이건 간에 작품의 뜻과 형식, 구성 요소가 천편일률적이다. 한 작가가 만든 것처럼 보인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은 다 똑같이 언제나 영웅적 주인공이고 배경에 나오는 민중은 다 행복하고 열성적인 표정이다. 작가들이 각자의 창의(創意)를 펼치고 구현하는 흥미로운 개인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체제 유지에만 관심 있는 어용 공무원으로 보인다.
 
이렇게 북한의 관치미술에서 보이는 지루함과 비슷비슷함은 남한의 민중미술에도 거의 똑같이 나타난다. 나치와 북한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미술에 폐쇄적 정치성을 강요한 것이라면 민중미술은 민중미술가들이 스스로에게 집단적으로 정치적 목적만을 미술의 근간으로 자가 부여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폭압적인 독재에 맞서 용감하게 저항한 민중’과 ‘자본주의 체제의 부조리와 갈등’이 민중미술에 일관되게 흐르는 정치적 주제이다. 민중미술가들은 이 주제 아래 개념적으로 통일되어 있어서 작품이 서로 많이 닮아있다. 그래서 임옥상의 <보리밭> 하나만 보더라도 다른 민중미술 작품에 나타난 민중의 모습, 분위기를 자동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민중미술가들이 애호하는 목판 채색에서도 홍성담과 김봉준, 오윤의 작품이 거의 비슷해 보인다. 북한 관치미술처럼 동일한 정치적 지향점 아래에서 한 작가가 그린 듯이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대대적으로 기획한 <광장> 전시에 관객이 별로 없는 것에 대해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한 신문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관객을 탓했다. “반 고흐, 데이비드 호크니 같은 서양 유명화가의 블록버스터 전시회에는 줄을 서면서 우리의 근현대사를 비춰주는 모처럼 만의 대규모 전시장이 한산하다는 것은 뭔가 잘못됐다. 좋은 전시회가 열릴 때 많은 관객이 찾아와야 더 좋은 전시회가 열린다. 문화를 창조하는 것은 공급자이지만 이를 발전시키는 것은 소비자이다.”
 
과연 그럴까? 유홍준 씨는 소비자를 탓한다. 그러나 국내 미술 관객들의 수준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와 있다. 전시에 관객이 별로 없는 것은 소비자가 볼 때 흥미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광장 전시의 일관된 주제는 한국 근현대사의 모순과 질곡,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치른 어려움과 상처, 부조리, 불편함이다. 항상 반복되는 정치 이슈로 소리치는 비슷비슷한 성향의 미술품이 전시장을 채우자, 마치 북한의 관치미술을 볼 때에 느끼는 무감동과 지루함이 관객의 발걸음을 전시장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을 뿐이다. 북한 관치미술은 체제에 대해 극단적으로 옹호하고 남한 민중미술은 체제에 대해 계속 화내고 조롱하는 차이만 있다. 예술 애호가들은 양극단의 정치 선동에 쉽게 지쳐버린다.

 


 
북한에 ‘민중미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북한 관치미술의 반대편에 서 있는 미술일 것이다. 그런 미술을 추구하는 작가들에게는 자유로운 예술혼의 실현이 절체절명의 이슈일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정부가 내리는 교시에 관계없이 마음대로 주제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미 제국주의 작가의 기법이라도 내 맘대로 실험적으로 모방해보고 활용해 볼 수 있는 자유, 북한 독재 정치 체제를 비판할 자유를 달라고 외칠 것이다. 이 미술가들은 이미 지하에서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을지 모른다. 남한의 이름난 민중미술가들은 북한의 만수대창작사와 평양의 사회주의 혁명 기념 조형물을 보고 “평양은 공공미술의 천국”이라며 감탄을 연발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북한의 저항미술가들은 그들의 어리석음과 얄팍한 예술관에 실망하고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은 통일된 동색(同色) 집단이 아니라 냉소주의자로부터 열정적 표현주의자, 외부 세계 미술의 단순 모방자, 김씨 일가의 우상적 형상을 지워버린 저항적 추상 미술가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작가들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자유세계에 존재하는 작가들의 다양성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을 것이다. 모든 저항과 실험을 소화해내고 뛰어넘어 자유인의 언어로 미술적 긍정을 함축해내는 진정한 미술가가 벌써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술 관객에게는 이들의 작품이 북한의 관치미술이나 남한의 민중미술보다 몇백 배 흥미 있을 것이다.
 


◆케이트 림(Kate Lim)은 미술 저술가이자 아트플랫폼아시아(Art Platform Asia) 대표로, 지난해 일본 도쿄화랑에서 열린 전시 ‘다섯 가지의 흰색-한국 5인의 작가’의 서문을 쓰고, 박서보의 영문 평전 ‘PARK Seo-bo: from Avant-Garde to Ecriture’(2014)을 출간한 바 있다. 그 외 저술로는 ‘Language of Dansaekhwa: Thinking in Material’(2017), ‘Making Sense of Comparative Stories of Art: China, Korea, Japan’(출간예정) 등이 있다.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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