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2 (화)

  • 구름조금동두천 9.3℃
  • 구름많음강릉 11.8℃
  • 맑음서울 10.0℃
  • 구름많음대전 10.8℃
  • 흐림대구 11.6℃
  • 흐림울산 11.0℃
  • 광주 8.5℃
  • 부산 9.4℃
  • 흐림고창 9.9℃
  • 제주 10.1℃
  • 맑음강화 8.5℃
  • 구름많음보은 10.5℃
  • 구름많음금산 10.9℃
  • 흐림강진군 8.0℃
  • 흐림경주시 11.2℃
  • 흐림거제 9.2℃
기상청 제공

사회뉴스

다수결의 절차적 결정력과 그 문제점

다수결의 절차적 결정력과 그 문제점




다수결은 “탁월한 방법”인가?


우리의 일상적 생활 속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사안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방법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중에서 어느 것을 특별히 일컬어 “탁월한 방법”이라고 묵시적으로 합의하여 평가할 만한 것이 있다. 그 방법은 무엇보다도 명백하고 효율적이어서 더 이상의 논의나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제한된 수의 상품을 일반 수요자들에게 무리 없이 구매의 기회를 주고자 할 때, 선착순 판매가 탁월한 방법이기도 하듯이, 이와 같이 탁월한 해결방법이라고 하면, 대개 모든 관련자들이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다고 할 정도로 확실한 것을 의미한다. “다수결의 원칙”은 바로 공정성을 가장 확실하게 보장하는 탁월한 방법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민주적 절차에 가장 충실한 태도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어떤 사람을 일컬어 민주주의자라고 하면, 그 사람은 다수(민중)의 사람들 각각이 주인으로서 직접 혹은 간접으로 참여하여 자신이 속한 조직 혹은 국가를 운영하는 원칙을 존중하는 그런 사람임을 의미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민주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다수의 의사를 따르는 것이 민주적 절차를 존중하고 문제의 해결을 위한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여긴다. 특히 하나의 조직 속에서 같은 일에 함께 종사하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수행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다를 때, 다수결의 원칙을 지키기도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확실하고 탁월한 민주적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평상적인 이해방식으로 말하면, 민주주의의 원칙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곧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여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다수결의 원칙은, 약하게 적용할 경우에는 문제해결의 필요조건이며, 강하게 적용할 경우에는 필요충분조건일 수도 있다.(Dahl, (Democracy and Its Critics, 1989, p. 135)


어떻게 보면 다수결의 원칙은 매우 단순한 규칙이기도 하다. 의견이 분분할 때, 상대적으로 더 많은 편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선택에만 의존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참여자들의 의견에 대하여 매우 확실하게 평등의 원칙을 적용한다는 생각이 있다. 예컨대, 한 학급의 대표를 선출하는 경우에, 구성원들이 각기 한 표씩으로 투표하여 최다 득표자에게 대표를 맡긴다. 이 방법은 키가 큰 편 혹은 작은 편, 남학생 혹은 여학생, 이 동네 아이 혹은 저 동네 아이의 구별 없이, 즉 누구의 투표냐에 상관없이 득표가 계산되므로, 투표자의 개별적 특성에 따른 편견 요인을 노출하지 않는 그야말로 평등의 원칙이 적용된 방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로 말해서 “같으면 같이 대우하는 방법”이다.


학급에 소속한 학생이라는 똑같은 구성원의 자격으로 각기 실시하는 투표는 오직 한 표로만 계산되고, 각각의 투표는 어느 것이나 각자가 선호하는 바를 스스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다수결의 원칙은 여러 가지의 기준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유일한 방법으로 수용된다. 즉, 그것은 투표자의 성격, 성별, 신체적 특징, 가정적 배경, 개별적 편견 등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구성원의 자격을 지닌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정책적 선택의 조건을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민주적으로 공정하다고 여기게 된다.


사람들은 이러한 다수결의 원칙에 관해서 대체적으로 관습적인 친숙성을 이미 지니고 있으며, 또한 별로 이의 없이 민주적 공정성을 나타내는 확실한 방안으로 믿고 있다. 그만큼 합법성을 인정받는 셈이다. 그러나 잘 검토해 보면, 그 합법성은 단순히 절차적 합법성일 뿐이다. 다수결의 원칙은, 계수(計數) 이외에는, 구성원의 임의적 선택에 그냥 맡겨 버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더라도 모두 수용한다.


그러한 임의적 선택의 동기는 각자에 따라서 엄청나게 다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개인적 취향 때문이고, 어떤 사람은 당장의 이해관계 때문이고, 어떤 사람은 관련자들에 대한 동정심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차후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두고 염려도 하지만, 일단 의무적으로 받아들이고 문제로 삼지 않는 경향도 있다.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수결 이상으로 합법성을 달리 내세울 길이 없다고 여긴다.


그리고 때로는 다수결에 맡기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더욱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이 그 선택을 더욱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수결에 맡기고 그 결과에는 이의 없이 복종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하여 다수결은 결국 일종의 관습적 혹은 타성적 적응을 하는 모양새가 되고, 어떤 의미에서 그만큼 다른 대안을 거부하는 맹목적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수의 절차적 결정력을 능가하거나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어떤 집단의 대표를 뽑는 선거에서 보듯이, 특정한 선택을 제안한 측은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한 캠페인의 과정에서 열성을 다하고 때로는 그야말로 결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그리고 다수결이 진행되는 과정에는 때때로 구성원의 무지로 인하여, 혹은 우연적인 사건의 발생으로 인하여, 때로는 반대편의 속임수나 선동으로 인하여 잘못된 결정이 만들어졌다고 차후에 판명되는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투표나 개표의 행위 그 자체에 결정적인 부조리의 문제가 발견되지 않으면, 그 결과를 수용하는 것은 일종의 묵시적 규칙이 되어 있다.


소위 민주국가에 사는 우리는, 한 편으로, 이러한 불안정성을 지닌 민주적 절차에 의한 정치적 생활의 부담을 안아야 한다는 것 그 자체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 볼 만도 하다. 왜냐하면, 단순히 편향된 선입견이나, 특별한 선동 혹은 속임수의 전략에 의해 기만을 당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불안정성 그 자체는 그냥 민주주의가 지닌 본질적 특성이라고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분위기도 가끔은 관찰된다. 어차피 민주적 선(善)은 “상대적 선”일 뿐이라고 여기고, 도덕적 긴장의 절대성을 요구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다수결의 원칙과 분배적 정의의 가치론적 비교


위와 유사하게 구성원의 도덕적 긴장을 기대하는 것과 관련하여, 여기서 우리는 잠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자유주의 사회에서 분배적 정의의 문제가 성립하는 요건으로 든 두 가지 사항을 두고 참고삼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분배적 정의의 문제는, 첫째로 특정한 가치의 희소성이 발생한 상황에서 생긴다는 것이고, 둘째로 그 가치를 분배받고자 하는 수혜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사심이 없는 마음의 상태”(disinterestedness)로 임하는 풍토가 조성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공기를 마음대로 호흡할 수 있으므로, 즉 공기에 관한 한 희소성의 문제가 없으므로 정의로운 분배의 문제를 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실제로 희소성의 문제가 있는 어떤 가치를 나누고자 할 때, 그 가치의 수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심이 없는 사람으로서 이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성숙한 시민적 도덕성의 원칙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다수결 원칙에도 의사결정의 과정에서 구성원들은 사심 없이 참여하여야 한다는 성숙한 도덕성을 요구할 수는 없는가? 지극히 당연한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세련된 민주주의의 실현을 기대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세히 생각해 보면, 분배정의의 요건과 다수결의 요건에 있어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민주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구성원은 사심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구와 함께 자신이 선호하는 바를 표현함으로써 조직 혹은 국가의 가치지향적 방향과 정책의 결정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기회에 임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성숙한 시민의식은 필요로 한다. 예컨대, 의사표현의 기회를 공정하게 나누고, 질서 있는 논의의 장을 유지하며, 의견이 다른 목소리를 성의 있게 경청하고, 사욕을 채우고자 선동하지 않으며,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스스로 반성적 검토를 해야 하고, 정직하고 명확한 의사표현을 하는 것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는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도덕성의 부분적 요구에 지니지 않는다.


이러한 시민의식도 결국은 각자가 선호하는 바를 관철하기 위한 자기중심적 목적을 지향하는 노력이라는 규칙으로 의미를 지닐 수는 있다. 분배정의의 경우처럼 타인에 대한 배려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즉 개인적 이기심이 철저히 배제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양한 이기심을 무시하고 여전히 객관적 기준의 요청에 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는 바로 다수결의 원칙 이상의 것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하여 다수결의 원칙은 민주적 의사결정을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당연시되는 위치에 두게 된다. 우리 생활의 많은 문제에서 일반적으로 다수결의 원칙을 적용하면 별로 큰 문제가 없는 경우가 보통이다.


다수결의 적대적 결정력이 지닌 문제점


그러나 다수결의 원칙에 의한 종국적 선택은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있다. 바로 그 선택은 다른 대안과의 경쟁에서 거둔 승리 혹은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적대적 상대를 의식하게 한다.


내가 선호하는 A안이 관철되지 않고 나와 이 안의 지지자들에게 심각한 불이익을 가져다 줄 수도 있는 B안으로 결정된다면, 적수에 대하여 항복해야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결정적 치명상을 입게 된다. 그러므로 그냥 양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여러 경우에 더욱 좋은 엄격한 방안임을 확정짓기 위하여 “절대적 다수결”의 규칙을 적용하기도 한다. 단지 기계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절대적 다수결의 원칙은 사안의 성격에 따라서 적어도 과반수 혹은 3분의 2 이상, 더욱 엄정하게는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절대적 기준도 상황적 특징에 따라 정하게 된 임의적 설정일 뿐이다. 이미 유리한 위치에 있는 방안을 좀 더 확실하게 결정짓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 우리는 “상대적 다수결”의 원칙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선택의 방안이 3파전 이상이 되었을 때는, 어느 선택도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최다수의 선택”은 결국 절대적 다수가 아니라 소수의 지지를 받은 상대적 다수이며 전체적으로 보아 소수에 속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전체가 합리적으로 다수결의 원칙을 준수했다고 하는 데는 불합리성이 없지 않다. 적어도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소수의 지지를 받은 방안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는 정치적 선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는 다수당이 되기 위하여, 노선상 지향하는 바가 비슷한 소집단들이 협상을 통하여 절대적 혹은 상대적 다수당의 자리를 확보하는 전략적 움직임을 취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게 있다. 엄격히 말하면, 이 경우에도 소수로 구성된 집단들이 전략적으로 타협한 것이므로 순수한 절대적 다수라고 평가받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절대적이든 혹은 상대적이든 간에, 선택요인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을 때, 사실상 다수결의 원칙에 의한 최종적 선택이 지니는 위세와 효율성은 어느 의사결정의 방법보다도 당당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가장 구체적인 현상은 바로 여러 형태의 선거에서 볼 수 있다. 다수결에 의한 선택은 승리자에게 모든 것을 안겨 주는 것이 소위 민주적 방식의 선거제도이다. 때로는 그러한 선거의 결과가 가져다주는 엄청난 이익을 쟁취하기 위하여 경쟁이 과열되면, 전략적 효율성, 대중적 설득력과 같이 정당화되는 수단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기도 하지만, 거짓된 선전, 왜곡된 선동, 폭력적 외압, 투표자의 매수, 절차적 부정행위 등이 작용하기도 한다.


하기는 다수결의 원칙뿐만 아니라, 모든 민주적 절차는 단순히 절대적인 기계적 과정으로 그 의미를 다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성공을 말할 때, 오히려 조직의 구성원들이 그 과정(혹은 절차에)에 임하여 최선의 이지적-도덕적 바탕과 자질이 작용한 결과일 것을 요구한다. 매우 너그럽게 생각하여, 우리는 민주주의적 제도와 행위에 대하여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절대적 가치의 구현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최선을 요구하는 것이 일반적인 기대이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수결이라는 규칙 그 자체의 탁월성이 아니라, 그 규칙에 따라서 실제적으로 작용하는 조직 구성원의 문화적, 인성적, 이지적 바탕의 탁월성이다. 이 말을 바꾸어 검토하면, 그러한 바탕에 결정적인 악재(惡材)가 작용한다면 민주주의는 궤멸(潰滅)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다음 글에서 그 악재에 관하여 논의를 잇고자 한다)


관련기사

93건의 관련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