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아이들의 최신 문화를 꼽으라면 단연코, ‘부캐’ 문화입니다. 그야말로 아이들이 활동하는 디지털 곳곳에 ‘부캐’가 없는 데가 없을 정도니까요. 대체 ‘부캐’가 뭐길래 모두 ‘부캐부캐’ 할까요. ‘부캐’는 '부 캐릭터'의 줄임말로 ‘서브 캐릭터’라고도 부릅니다. 물론, ‘본캐’는 본래의 캐릭터를 말하고요. ‘부캐’는 원래 게임에서 쓰이던 용어였으나 최근에는 각종 방송을 비롯해 SNS 등 일상에서 더 넓게 쓰이고 있죠. 부모님들은 선뜻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대체 ‘부캐’와 ‘본캐’가 무슨 말이냐 싶겠지만, 예를 들어, 부모의 경우 원래의 직업이 있는 데 부업을 하고 있다면 부업은 ‘부캐’가 될 수 있습니다. 직장인이지만 소설을 쓰거나 공예를 한다면 소설가와 공예가 또한 ‘부캐’가 될 수 있죠.
10대 아이들의 경우, 낮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하교 후에는 유튜브 활동을 하는 게 ‘부캐’ 문화 중 하나입니다. 또,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아이가 가진 재능을 SNS에서 본 계정이 아닌 다른 계정으로 보여주는 것도 ‘부캐’의 대표적인 사례죠. 그러니까 학교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학생이지만 디지털 공간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활동하는 아이들이 바로 ‘부캐’의 주인공들인 셈입니다. 어쩌면, ‘부캐’는 콘텐츠가 풍성한 디지털 공간이 제격입니다. 그래서 디지털 세대인 10대 아이들에게 ‘부캐’는 다양한 역할을 해볼 수 있어서 꽤 매력적일 수밖에 없죠.
‘부캐’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MBC ‘놀면 뭐하니’에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인기 개그맨 유재석이 ‘뽕포유’라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신인 트로트 가수 ‘유산슬’이라는 ‘부캐’를 들고나오면서 대중들에게 ‘부캐’를 알렸고, 이후 신인 혼성그룹 ‘싹스리’가 인기를 끌면서 ‘부캐’ 문화가 유행됐죠. 특히, 개그우먼 김신영이 한 인기 예능프로그램에서 ‘둘째 이모 김다비’라는 부 캐릭터를 들고나와 재미와 감동을 주면서 ‘부캐’를 대중문화로 확산시키는 역할도 했습니다. 유명 연예인이 쏘아 올린 ‘부캐’ 문화는 고스란히 10대 아이들에게 전달됐고, 요즘은 아이들 사이에서 본명이 아닌 다른 이름과 캐릭터를 사용해 ‘또 다른 나’를 즐기는 문화로 발전했습니다.
‘부캐’ 문화가 확산하면서 최근에는 아이들 사이에서 여러 개의 직업을 갖고 싶다는 이야기도 곧잘 나오곤 합니다. 요즘 아이들답게 한 가지 일에 몰두하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역을 다 해보고 싶다는 뜻이겠죠. 어쩌면 20대 사이에서 인기 있는 ‘N 잡러’ 현상이 아이들에게까지 뻗친 현상이라고 봐도 될 것 같고요. 흥미로운 조사를 하나 소개하자면, 2020년 11월, ‘엘리트 학생복’ 연구팀은 10대 아이들 대상으로 ‘부캐’ 문화에 관한 설문을 진행했는데요. 이 조사에서 청소년의 10명 중 9명이 ‘부캐’ 문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답했습니다. 꽤 많은 숫자죠. ‘부캐’가 좋은 이유로는 ‘표현의 자유 때문에’라는 응답이 10명 중 6명을 차지했고, ‘다양한 경험’과 ‘스트레스 해소’, ‘새로운 자아 발견’이 10명 중 2명을 차지했더군요. 이 대목은 부모가 눈여겨 볼 부분입니다. 또, 반면에 부정적이라고 응답한 아이들은 10명 중 1명이었는데, 주로 ‘거짓 행동이다’, ‘익명을 내세워 악용한다’라고 대답해 ‘부캐’ 문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설문에 참여한 학생의 절반 이상은 SNS 부계정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고 응답해 요즘 아이들의 ‘부캐’ 문화가 대체로 SNS에서 이뤄지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아이들의 ‘부캐’ 문화가 가장 활발한 곳은 ‘메타버스’ 공간일 겁니다. 대표적으로 아이들이 즐겨 찾는 ‘제페토’를 보더라도 플랫폼에 입장하면, 나를 대신할 아바타 즉, ‘부캐’를 꾸미는 일부터 시작하잖아요. 이때 아이들은 ‘본캐’를 잊고 내가 상상했던 캐릭터로 자신을 꾸미며, 메타버스가 제공하는 가상의 시공간에 본능적으로 동화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가상공간에서 자주 머물수록 ‘본캐’는 뒷전으로 밀리고 이쁜 아바타만 추구하는 ‘환상주의’ 에 빠질 수도 있어 주의가 필요하죠. ‘부캐’ 활동이 점점 심해지면, 아이는 현실을 부정할 수 있고 결국, ‘본캐’와 ‘부캐’ 중 어떤 게 정확히 ‘나’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아찔한 상황까지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부캐’라는 주제가 나오면, 전문가들은 ‘멀티페르소나’에 관한 우려를 말하곤 합니다. 다시 말해 아이들은 “가면이 많으면 헷갈릴 수 있다”라는 뜻이죠. 하지만 최소한 멀티페르소나는 아이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발달 심리학자인 에릭 에릭슨은 ‘사회성 발달 이론’에서 인간의 생애 주기를 총 8단계로 구분했는데 특히, 청소년기를 ‘정체성 성취 대 정체성 혼란’을 겪는 시기로 규정하면서 청소년 시기에 정체성을 갖지 못하면 계속해서 혼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죠. 그래서 청소년기는 성인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찾는 여정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시기에 정체성을 찾지 못하면 성인기로 연장되는 경우도 제법 많습니다. 실제 20대 청년들이 자기 정체성을 갖지 못해 자잘한 사건 사고로 이어지는 사례도 꽤 있죠. 그만큼 10대 아이들은 내가 누구인지 또, 나는 집, 학교, 또래 집단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부캐’ 문화는 본래의 캐릭터 즉, ‘본캐’를 전제로 한다는 걸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0대 아이들은 아직 정체성이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부캐’를 만든다는 건, 오히려 성장 과정에서 더 혼란을 겪을 수 있어 걱정됩니다. 무언가를 시도하고 경험하는 거야 나쁠 게 없다지만 중요한 건, ‘부캐’ 문화는 엄연히 ‘본캐’가 튼튼해야 안전한 문화가 되지 않을까요.
‘부캐’ 문화가 우리 아이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이런 마당에 걱정거리를 이야기하는 게 눈치 없는 행동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하늘이 두 쪽 나도 할 말은 해야 한다고 봅니다. 얼핏 보면, ‘부캐’ 문화가 문제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누구보다 디지털 기술력이 뛰어나고 적응을 잘하는 아이들이다 보니 자기의 정체성을 여러 개로 나눠 실험해보고 고민할 수 있다면야 그만큼 좋은 일도 없겠죠. 하지만, 아이들의 ‘부캐’ 문화가 단순히 여러 가지 ‘역할 놀이’에 빠져 흥미만을 쫓는다면 성장 과정에서 정체성을 망각하는 심각한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아산나눔재단’에서는 ‘부캐’를 주제로 아이들에게 ‘창업’ 프로그램을 운영한 적이 있습니다. 또, ‘서울문화재단’에서는 가족 소통을 위해 부모님의 새로운 모습을 찾아보는 ‘부모님 부캐 찾기 사무소’를 운영해 가족 소통을 끌어내기도 했죠. 물론, 행사에 참여한 아이들은 모두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합니다. 특히, ‘부캐’ 문화를 통해 자기와 가족의 정체성을 함께 발견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말한 아이도 있어 흐뭇했습니다. 결국, ‘부캐’ 문화가 아이들에게 안전한 문화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본캐’를 위한 다양한 콘텐츠도 함께 개발해야 한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중요한 건, ‘부캐’는 아이들의 ‘정체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꽤 신중한 문화라는 겁니다. 단순히 어릴 적 ‘소꿉놀이’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출처: 조선에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