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어느 것을 육성할 것인가?
-- 교육의 달인 5월에 즈음하여,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그리고 교사가 제자를 위하여 한번 생각해 볼 만한 제목 --
자연적-문화적 환경 속에서 자신의 성장, 즉 자아실현을 통한 개성의 성장을 위하여 학교와 가정은 젊은이들에게 어떤 경험의 세계를 선택하도록 도와야 하는가? 노래를 좋아한다고 해서 반드시 노래를 잘한다는 말은 아니다. 수학을 싫어한다고 해서 반드시 수학을 잘 못한다는 말도 아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이 있고 싫어하는 것이 있으며 잘하는 것과 잘못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싫어하고 잘못하는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정리해서 보면,
(1) 좋아하기도 하고 잘하기도 하는 것이 있고,
(2) 좋아하지만 잘못하는 것이 있다.
(3) 싫어하지만 남보다 잘하는 것이 있고,
(4) 싫어하기도 하지만 잘 못하기도 하는 것이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하고 싶은 것을 못하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잘못하는 것을 억지로 하라고 강요받기도 한다. 좋아하는데도 잘못한다고 해서 그만 하라고 야단맞기도 하고, 좋아하고 잘한다고 해서 그렇게만 하라고 부추기기도 한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다르다면 아이의 진로나 장래를 위하여 잘하는 것을 하라고 시킬 것인가, 아니면 좋아하는 것을 하라고 시킬 것인가?
내재적 동기와 외재적 동기
물론 아이들이 성장의 과정에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릴 때 다르고 자라서 다르기도 하다. 좋아하던 것도 어느 시기에 이르면 싫어지기도 하고 남보다 잘하던 것도 자라서는 상대적으로 뒤지는 수가 있다. 그리고 성장의 과정은 단순히 신체적-정신적 능력의 일정한 향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범위의 계속적인 확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많은 것을 새롭게 또 새롭게 경험하게 되고, 관심과 취미도 이에 따라 달라지면 잘하고 못하는 것에 적지 않은 변화가 생긴다.
어떻든, 아이가 좋아한다는 것은 누가 강요하지 않더라도 즐겨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잘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관찰한 바로는 잠재력이 다소 그 방면에 있음을 비쳐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잘하고 있다는 말은 그 일과 관련하여 아이의 “잠재적 능력”의 한 요소가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고, 좋아하고 즐긴다는 것은 그 일을 하는 당사자의 “내재적 동기”가 주도한다는 말이다. 그 좋아하고 즐기는 성향을 바꾸자면 “외재적 동기” 예컨대 부모나 교사는 칭찬이나 징벌이나 회유 등에 의해서 관심과 습관을 새롭게 형성하게 해야 할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시킬 것인가, 아니면 잘하는 것을 시킬 것인가의 질문은 바로 “내재적 동기”와 “잠재적 능력”의 어느 것을 더 중시할 것인가의 질문이기도 하다.
인간의 활동, 특히 의도적인 활동에는 그 활동을 하게 하는 어떤 심리적인 힘이 작용한다. 어떤 욕구, 필요, 의지와 같이 직접적이고 순간적인 것도 있고, 입지(立志), 포부, 소망, 집념 등과 같이 다소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것도 있다. 그 힘을 일컬어 심리학에서는 “동기”라고 하고 모든 의식적인 행위와 활동에는 크고 작고 간에 어떤 동기가 작용한다. 일반적으로 동기의 개념은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할 때 거기에 작용하는 그 행위자의 내면적 혹은 외부적 힘의 작용을 의미하고,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와 “외재적 동기(extrinsic motivation)”로 구분하기도 한다. 내재적 동기는 내재적 가치를 추구하고 외재적 동기는 외재적 가치(혹은 수단적 가치)를 위한 것이다.
과학자는 어떤 법칙이나 이론을 이해하고 거기에 근거하여 새로운 연구를 위한 가설을 설정하고 그것을 검증하는 일을 한다. 탐구자로서의 활동 그 자체에 몰두해 있고 그 과정을 즐기고 희열을 경험한다면, 그 자체가 연구자에게 보상이며 또한 활동이 지향하는 내재적 가치이고 그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바로 내재적 동기이다. 그러나 그 과학도가 행한 일련의 탐구활동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고 목적하는 바는 영리나 명성이나 지위 등의 보상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 힘은 외재적 동기에 해당한다. 한 학습자가 공부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학습에 종사하면 내재적 동기에 의한 것이고, 칭찬을 듣거나 징벌을 면하거나 일등하거나 합격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있으면 외재적 동기에 의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 학생이 수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수학의 질서와 세계를 분석하고 조작하고 이해하는 과정 그 자체만을 즐기지는 않는다. 애초에는 어떤 깨달음의 즐거움도 있겠지만 오히려 칭찬이나 보상을 통한 외재적 동기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있고, 내재적 동기에 지배되는 단계는 상당한 정도의 학습경험이 진행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학에서 재미를 느끼고 그것을 즐기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자식을 피아니스트로 키우고 싶은 부모는 아이가 피아노를 배우는 초기에는 칭찬도 하고 야단도 치면서 가르쳤지만, 아이는 나중에 피아노를 무엇보다도 즐기는 생활을 하게 된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학습이나 노력에는 반드시 어느 하나의 동기가 배타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어른이 된 경우, 예를 들어 어떤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고 함께 공부하고 제자의 성장을 보면서 사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어서 교직에 애착을 버리지 않고 헌신의 생활을 하는 것, 즉 교직의 내재적 동기에 충실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과정에서 때로는 주변에 눈을 돌려보고 자신의 삶의 모습을 타인과 비교할 때, 예컨대 한 친구가 정치계에 진출하여 자기보다 막강한 권력의 행사를 즐기고 있거나, 사업에 성공하여 경제적으로 자기보다 훨씬 풍요한 생활을 누리는 것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고 자신의 내재적 동기가 희석되기 시작할 수도 있다.
한 학생이 평소에 문학이나 과학이나 어느 분야에서 그야말로 내재적 동기에 지배되어 공부를 즐기고 그 자체로서 보상을 받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학년말에 보니 일등은 다른 친구가 가져가고 소위 일류대학에 진학하기도 어렵게 되고, 아무도 자기를 칭찬해 주는 사람도 없으며, 더 이상 공부 그 자체의 즐거움에 빠져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적어도 어느 수준의 외재적 가치의 요소가 따르지 않으면 내재적 동기만으로 자신의 활동과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내면적 만족과 외재적 보상은 어느 정도의 균형을 필요로 한다.
다시, 아이에게 좋아하는 것을 시킬 것인가, 아니면 잘하는 것을 시킬 것인가의 질문에 대하여 우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잘하는 것은 잠재적 능력이 작용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일 수가 있고, 좋아하는 것은 환경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수도 있다. 좋아한다는 것은 내재적 동기가 충족되고 있는 상태이지만, 좋아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시키는 것은 아이의 자율적 자아형성에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이므로, 적어도 외재적 동기보다는 내재적 동기가 주도할 수 있는 것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물론 외재적 동기로 시작하여 내재적 동기로 전환하는 것이 때때로 가능하기 때문에, 상벌이나 보상의 방법과 같은 외재적 동기의 유발은 일시적 수단으로 사용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외재적 동기의 유발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은 내재적 동기의 지속적 유지 자체를 어렵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으로 변하여 어떤 공부가 외재적 동기에 지배되도록 방치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공부와 관련하여 아이가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것을 관찰하거나 아니면 좋아할 수 있도록 유도할 필요는 있고, 그것이 불가능하여 아이가 상벌과 강제 등의 외재적 동기에 지배되는 상태로 묶어 두는 것은 교육적으로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잠재력의 관찰을 위한 기회의 장
그러면 좋아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시킬 것인가? 좋아하는 것도 그것이 요구하는 능력이 없으면 좋아하는 것 그것만으로 보람된 인생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내재적 동기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다. 좋아하는 것에의 보상은 만족감이고, 만족감이 지속적으로 혹은 간헐적으로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계속해서 좋아할 수 없게 된다. 바로 내재적 동기는 힘을 잃게 된다. 그래서 흔히 “소질”이라고 하는 것이 전혀 없으면 만류하는 것이 보통이다. 쉬운 대답은 적어도 잘할 수 있는 소질, 말하자면 좋아하는 것 그것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잠재력은 일종의 성향(disposition)이다. 사물의 성향도 그렇지만 인간의 성향은 숨겨진 것이지 언제나 지금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휘발유는 “가연성,” 즉 불에 탈 수 있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항상 휘발유가 불에 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어떤 수준의 고온이 일시적으로라도 주어져야 불이 붓고 탄다.
그렇듯이, 잠재력도 일종의 성향이라는 말은 숨겨진 것이지 나타난 능력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숨겨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떤 아이가 공격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항상 남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심의 어떤 요소가 작용하여 좌절을 경험하거나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공격적 성향이 파괴적 행동으로 관찰된다. 어떤 성향이 있다고 말할 때, 특정한 조건 혹은 환경이 주어지면 기대한 실제의 행동이나 변화를 나타낸다. 말하자면 그 성향이 실제로 나타날 수 있게 하는 조건 혹은 상황이 주어져야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잠재력의 유무를 파악하려면, 그것이 발휘될 수 있는 환경, 여건, 조건 혹은 상황을 제공해 보고 기대한 결과가 관찰되어야 한다. 아이가 어떤 잠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발휘될 수 있는 경험의 장을 제공해 보아야 한다. 그러한 경험(혹은 학습)의 장이 제공되지 않고는 잠재력의 유무를 파악할 수가 없다.
부모들은 아이가 여러 가지의 경험을 하는 것은 아이의 건강한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박물관에도 데려가고 축구도 시켜보고 여행에도 데려가고 연극도 시켜보고 바이올린도 가르쳐 본다. 여러 가지의 폭넓은 경험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러한 다양하고 폭넓은 경험의 장에서 부모나 교사나 학생 자신이 어떤 능력이 실제로 발휘되고 있고 어떤 상황을 잘 감당하며 무엇을 즐겨하는가를 할 수만 있으면 체계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잠재적 능력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능력(혹은 성향)이 발휘될 수 있는 경험(혹은 학습)의 장을 제공해 보아야 한다. 가장 잘하는 것이 무엇인가, 잘못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관찰해 보아야 한다.
가정에서 부모와 가족이 아이들을 위한 행사나 일을 계획한다면 잠재력을 관찰한다는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학교의 특별활동과 클럽활동도 단순히 정규의 교육과정을 보완하는 수준의 학습활동으로만 운영할 것이 아니라, 교사가 학생의 잠재력을 파악하는 기회로, 혹은 학생 자신이 자신의 잠재력을 시험해 보는 체험의 장이 되도록 기획할 필요가 있다. 학생 자신도 친구를 사귀고 견문을 넓히고 일을 추진해 보고 새로운 세계를 알고 지식을 넓히고 사회적 활동을 해 보고 하는 것 등의 경험은 그 자체로서도 바람직하지만, 이러한 기회에 내가 좋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알아보는 기회로 삼으면 더욱 가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단순히 말해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좋은 취향과 좋은 능력으로 평가되는 것이라면, 성공적인 삶은 내가 가장 좋아하고 동시에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논리로 본다면, 아이가 잘하는 것을 관찰하여 그것을 좋아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외는 있다. 내가 좋아하든지 않든지 간에, 그리고 내가 잘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내게는 특별한 사명과 보람이 있어서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뜻있는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굳게 자리 잡은 경우, 그리고 나는 내 인생이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오직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겠다는 타협이 불가능할 만큼 확고한 목표가 있다면, 문제는 다르다. 좋은 신념은 좋은 능력에 우선한다. 이 부분은 탁월한 잠재력의 요청이 아니라 준엄한 인격의 요청이다.